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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20호, 양력 : 5월 7일, 음력 : 4월 3일
[53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04] 중국 사신(使臣)에게 우유로 만든 타락죽(駝酪粥)과 돼지머리 편육을 올렸다
2019. 05. 07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곡식에 물을 부어 알갱이가 푹 무르도록 오래 끓인 음식을 죽(粥)이라 하였는데, 쌀, 조, 율무 등의 곡식에 채소나 종실류(種實類), 육류(肉類), 약이(藥餌)성 재료 등의 부재료를 넣어 쑤었으며, 상(喪) 중에 있을 때는 식사대용으로 먹었고, 그 밖에 환자식, 보양식, 구황식 외에 사신 접대 음식으로도 쓰였습니다.

죽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물을 적게 넣어 끓인 된 죽을 전(饘), 묽은 죽을 죽, 뻑뻑한 죽을 조(稠), 맑은 죽을 이(酏)라고 하여 농도별로 분류하였고, 40종의 서로 다른 죽을 쑤는 법이 알려져 있으며, 왕실에서는 쌀로 만든 흰죽, 우유 및 타락죽, 잣죽, 깨죽, 검은 깨로 만든 흑임자(黑荏子) 죽, 살구 씨로 만든 행인(杏仁) 죽 등을 많이 올렸습니다.

이러한 죽 중에 타락죽(駝酪粥)은 우유를 끓여 익힌 우유에 효(酵)를 넣고 발효시킨 일종의 발효유인 타락(駝酪)을 넣어 끓인 것으로, 타락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유방이 좋은 암소의 젖을 송아지에게 빨리다가 젖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방을 씻고 젖을 받아, 많을 때에는 1사발, 적을 때에는 반 사발 정도를 받아 체로 3번 걸러서 끓인 후에 남겨둔 숙타락(熟駝駱)을 오지항아리에 우선 담아 준비를 하게 되며, 여기에 작은 잔 1잔 분량의 본타락(本駝駱)을 섞어 위를 두껍게 덮은 후에 따뜻한 곳에 놓아두면, 한참 후에 나무꽂이로 찔러 누런 물이 솟아나게 되어 오지항아리를 시원한 곳으로 옮겨 만들었는데, 이때 만약 본타락이 없으면 좋은 탁주(濁酒)를 중간 정도 크기의 그릇인 종지(鍾子)로 한 종지 넣어도 좋고, 본타락을 넣을 때 좋은 초(醋) 약간을 함께 넣으면 더욱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타락은 궁중에서는 몸이 아픈 제신(諸臣)이나 왕족들에게 음식으로 만들어 몸을 보신 시켰는데, 특히 중국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반(早飯)으로 죽상(粥床)이 올라갔으며, 이 때에 중간 크기의 사발인 완(椀)에 담긴 타락죽(駝酪粥)과 중간 크기의 접시에 담긴 돼지머리편육(猪頭片), 중간 크기의 사발에 담긴 병아리로 만든 계아탕(鷄兒湯) 등이 차려졌고, 이중에 가장 중요한 음식은 타락죽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이밖에도 왕실의 의약(醫藥)을 맡아 보던 관청인 내의원(內醫院)에서는 물에 불린 쌀을 물과 함께 맷돌에 간 후 체에 밭쳐 가라앉힌 앙금인 쌀무리를 먼저 쑤다가 반쯤 익으면서 생우유를 부어 섞어 쑨 우유죽도 준비하여 올렸는데, 생우유가 한 사발이면 쌀무리는 다소 적게 넣고 만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53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이 수일(數日) 동안 전죽(饘粥)을 들지 않고 몹시 슬퍼하기를 예제(禮制)에 지나치므로, 영의정(領議政) 등이 죽(粥) 들기를 권하니 임금이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종실록 153권, 성종 14년 4월 3일 을축 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정창손 등이 전죽 들기를 청하니 따르다

임금이 수일(數日)을 전죽(饘粥)을 들지 안하고 몹시 슬퍼하기를 예제(禮制)에 지나치므로,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 등이 아뢰기를,

"전하(殿下)께서 애통하시는 정(情)을 어찌 차마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컨대 종사(宗社)를 생각하여 슬픔을 억제하시고 죽(粥)을 드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3책 153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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