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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26호, 양력 : 5월 15일, 음력 : 4월 11일
[601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10] 전국 8도에 중국에 진헌(進獻) 할 강아지 200여 마리를 기르게 하였다
2019. 05. 15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강아지에 관한 기사는 40여건이나, 이외에 한자로 구아(狗兒), 구자(狗子)등의 표기로는 각각 20여건, 5건의 기사가 있으며, 주로 사신(使臣)들에게 외교적으로 하사(下賜)하거나, 지방관리가 진상하는 내용이 많고, 특이하게 사람의 이름으로도 몇 건의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 강아지에 관한 기록 중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종(太宗)대에는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의 심부름을 하는 사인(使人)이 와서 활과 화살인 궁시(弓矢), 마필(馬匹), 강아지(狗兒)를 바친 바가 있으며, 세종(世宗)대에는 중국 사신이 엷고 무늬가 둥근 비단인 궁초 50필로 모시와 마포를 바꾸어 주기를 청하고, 강아지 두 마리와 잠자리에 까는 돗자리인 침석(寢席) 각각 하나씩과 산유자(山柚子) 꽃무늬를 놓은 금띠를 청하고, 따라온 조리사인 숙수(熟手)들은 구리거울과 침석을 청하니, 모두 다 그 청구하는 대로 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종전에 중국에 진헌(進獻)할 강아지를 경기도에 66마리, 충청도에 9마리, 경상도 42마리, 전라도 59마리, 황해도·강원도 각 13마리, 평안도 11마리, 함길도 3마리로 배정하고 먹이를 주어 먹여 길렀었는데, 임금의 전지(傳旨)로 전에 작정한 수효를 감하고 각도의 영진(營鎭)에 40마리만 나누어 기르고 있어, 병조(兵曹)에서 진헌에 혹시 부족 될까 염려되어 종전에 정한 수(數)에 의하여 강아지를 구해서 먹이를 주어 잘 기르자고 건의하자 그대로 시행한 바가 있습니다.

문종(文宗)대에는 일본국 관서의 태수가 큰 칼인 대도(大刀) 2자루, 원숭이(獼猴) 2마리, 비단의 일종인 적직금(赤織錦) 1단(段), 청자주구(靑磁酒具) 등 토물(土物)을 바치고 강아지(狗子) 2마리, 다람쥐(栗鼠) 2마리, 거위(鵝子) 1쌍, 흰 오리(白鷗) 1쌍, 표피(豹皮) 5매(枚)등을 요구한바가 있고, 성종(成宗) 대에는 여러 도(道)에서 바치는 매(鷹)는 일찍이 정한 숫자가 없기 때문에 봉진(封進)하는 숫자가 번거롭고 지금 응방(鷹房)에서 기르는 것도 많으니 바치지 말도록 하고, 강아지(狗兒)도 또한 바치지 말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연산군(燕山君)대에는 봉진(封進)한 강아지(狗子)가 산돼지나 노루를 잘 무는 것이어야 하는데, 모두 그런 실력이 없어 쓰지 못하겠으니, 금후로는 그 중에서도 잘 무는 것을 골라서 들이라고 8도에 하서(下書)하였으며, 임금이 항상 내정(內政)에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그 턱밑에 방울을 달아 강아지가 방울 소리를 듣고 놀라 뛰면 그것을 매양 재미로 여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601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한양 망우리 근처 사고개(沙古介) 등지에 개(狗兒)들이 무리를 지어 8,9마리가 떼를 만들어 항상 사람의 시신을 먹으며, 매양 사람을 만나면 에워싸서 짖어대고 그를 무니, 홀로 경유(經由)하여 가는 자가 심히 괴롭다는 보고가 있자, 정예 군사인 갑사(甲士) 10여 기(騎)에 명하여 이를 쏘게 하였습니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4월 11일 신묘 기사 1418년 명 영락(永樂) 16년

사고개 개무리를 갑사에게 쏘아 잡게 하다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가 아뢰기를,

"사고개(沙古介) 등지에 개들이 무리를 지어 8,9마리가 떼를 만들어 항상 사람의 시신을 먹으며, 매양 사람을 만나면 에워싸서 짖어대고 그를 무니, 홀로 경유(經由)하여 가는 자가 심히 괴로와합니다."

하니, 임금이 갑사(甲士) 10여 기(騎)에 명하여 이를 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6책 35권 3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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