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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41호, 양력 : 6월 18일, 음력 : 5월 16일
[528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25] 임금이 어승마(御乘馬)를 빨리 달려 시종(侍從)들이 따라가지를 못하였다
2019. 06. 18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임금이 타는 말을 어승마(御乘馬) 또는 어마(御馬)라 하였는데, 궁궐 안에는 있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관리하였으며, 시대별로 차이는 있었으나 통상 어승마 10여필, 예차(預差) 10여필, 주마(走馬)14필, 변마(邊馬) 30필을 준비하였고, 실록에 어승마에 관한 기록은 50여 건으로 임금 대별 중요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세종(世宗) 대에는 임금이 타는 어마(御馬)를 조련하는 일로 사복시(司僕寺) 관원을 황해도(黃海道) 해주에 보냈는데, 황해도는 금년에 한해(旱害)로 인하여 실농하였는데, 지금 보내면 사람과 말을 치다꺼리하는 데에 시끄러운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명년 봄에 경기도 근처로 보내어 조련하자는 건의를 받고, 사복시에 탈 만한 말이 없어 지난번 광주(廣州)에서 임금이 사냥할 적에 탔던 말이 날뛰고 길들지 않았는데, 이는 조련하지 아니했기 때문으로 해주에는 새와 짐승들이 많으니 사냥을 해가면서 조련할 수가 있다고 하였으며, 내려가는 관리들에게도 음식 대접을 받지 말고, 역리(驛吏)들을 괴롭히지 말며, 사람이나 말이 먹을 것은 모두 국고의 쌀과 콩으로써 하고, 사냥에 몰이하는 군졸들도 교대로 당번한 군졸들을 쓰며, 힘써 그 폐해를 없애고 혹시라도 삼가지 않음이 없게 조치한 바가 있습니다.

성종(成宗) 대에는 호조(戶曹)에서 구황(救荒)하는 데 시행할 만한 조건들을 보고하면서,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는 말의 사료인 마료(馬料) 중 황두(黃豆)와 꼴(草)은 오랜 시일 동안 적당히 줄이게 하고, 어승마의 요(料)도 풀이 자랄 때는 5승(升)으로 하였는데 1승(升)을 줄이고, 좌우변(左右邊)의 큰 말(大馬)은 4승(升)이었는데 2승(升)을 줄이며, 마료를 수송하여 들이는 일은 계목(啓目)대로 하며, 수레를 끄는 거우(車牛)는 적당히 남겨두고 없앨 것은 모두 화매(和賣)하게 한 바가 있으며,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가 어승마(御乘馬)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함경도인 영안도(永安道)에 겸사복(兼司僕)등을 보내어 구하도록 하자는 보고에 흉년에 말을 구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낼 수 없으니, 절도사(節度使)와 관찰사(觀察使)에게 하유(下諭)하여, 좋은 말을 얻으면 올려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연산군(燕山君) 대에는 임금이 어승마(御乘馬)를 빠르게 달려, 좌·우의 시종들이 아무리 따라가도 미치지 못하여 조용히 하여 달라는 건의를 받고, 지금의 말(馬)이 편안하거늘 어찌 아랫사람의 폐를 보아서 불편을 좇겠느냐고 물리친 바가 있으며, 경기 관찰사에게 어승마를 선택해 들이도록 하였는데, 도내에 좋은 말이 없다고 보고하자 성심으로 구한다면 어찌 구득하지 못하겠는가고 질책하며, 말들을 모아놓고 사복시에서 분간하여 뽑게 하였고, 사복시에서 어승마(御乘馬)를 간택할 때에 무인(武人)들이 그 말을 애석히 여기고 공가(公家)에서 간택하여 가는 것을 싫어하여 그만 입에 올려 떠들어대고 있으니, 뒤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장 1백을 때리고 영영 과거(科擧)를 보지 못하게 하며, 그 중에도 심한 자는 극형(極刑)에 처하게도 하였습니다.

중종(中宗)대에도 임금의 행차 중에 어승마(御乘馬)의 발걸음이 너무 빨라, 노쇠한 신하들인 재추(宰樞)들이 달려가도 미치지 못하게 되어 임금의 거둥이 종용하지 못하고, 앞뒤의 군졸들도 따라갈 수가 없다는 건의를 받고, 말이 더러 빨리 가는 경우가 있으니 마땅히 짐작하여 하겠다고 한 바가 있으며, 세자(世子)가 환궁할 때에 말이 놀라서 중도에 내려서 다른 말로 바꾸어 탔는데, 이는 오로지 평소에 길들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내승(內乘)에서 잘 길들인 말로 갈았어야 마땅한데도 미련하게도 이렇게 되게 하였으니 추국하여 죄를 다스리라는 건의를 받고, 이미 헌부를 시켜 추문(推問)하게 하였고, 평소에도 어승마(御乘馬)가 혹 놀라 달아난 적이 있으면 헌부를 시켜 추문하는 것이 관례인데, 세자가 탄 말이 놀라 달아난 일을 금부를 시켜 추문한다면 위아래가 전도된 일로 물리친 바가 있습니다.

528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사복시(司僕寺)에서 어느 사람의 늙고 병든 말을 받아들이고는 값을 줄 때에 품질이 좋은 아마(兒馬)를 가지고 병든 말이라고 일컬으면서 이를 보상(報償)했다 하자, 말을 나누어 준 곳을 빠짐 없이 글로 써서 아뢰라고 전교(傳敎)하고 있습니다.

 

■성종실록 253권, 성종 22년 5월 16일 신묘 기사 1491년 명 홍치(弘治) 4년

사복시 제조 윤호·이철균이 혐의를 피하고자 사직하기를 청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친히 열병(閱兵)하니, 사복시 제조(司僕寺提調) 윤호(尹壕)와 이철견(李鐵堅)이 아뢰기를,

"요사이 남흔(南忻)의 아뢴 말을 듣건대, 사복시(司僕寺)에서 어느 사람의 늙고 병든 말을 받아들이고는 값을 줄 때에 품질이 좋은 아마(兒馬)를 가지고 병든 말이라고 일컬으면서 이를 보상(報償)했다 하니, 이는 반드시 본 것이 있어서 아뢰었을 것이니, 피혐(避嫌)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일에 내가 말하기를, 마정(馬政)이 허술하여 전마(戰馬)를 겨우 40필만 얻게 되니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다.’라고 했더니, 남흔(南忻)이 이 말로 인하여 이런 아룀이 있었을 것이다."

하고는, 이에 남흔을 불러서 물으니, 남흔이 아뢰기를,

"신(臣)이 오랫동안 내승(內乘)이 되어 어승마(御乘馬)와 내구마(內廐馬)를 보았는데, 모두 많은 값으로 좋은 말을 가려서 받아들였는데도 마침내 간 곳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또 전일 제주(濟州) 가파도(加坡島)의 아마(兒馬) 3필을 좋은 준마(駿馬)로 여겨 별도로 길렀으나, 한 마리는 병이 들어서 죽고 두 마리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으니, 나머지도 모두가 이것과 같았습니다. 근일에 신(臣)이 길에서 사복시(司僕寺)의 종 낙산(樂山)이란 자가 아마(兒馬)를 받아서 가는 것을 만나서 이를 물으니, 병든 말이라고 대답하는데도 신(臣)의 소견(所見)으로는 매우 좋은 준마(駿馬)였습니다. 만약 그 말의 간 곳을 추문(推問)한다면 간사와 거짓이 저절로 드러날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김제신(金悌臣)에게 명하여 여러 정승(政丞)들에게 전교(傳敎)하기를,

"남흔(南忻)의 아뢴 바를 경(卿) 등은 이를 알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또 윤호(尹壕)에게 전교(傳敎)하기를,

"근일에 말을 나누어 준 곳을 빠짐 없이 글로 써서 아뢰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9책 253권 27장

【주】

내승(內乘) : 내사복시(內司僕寺)의 한 벼슬

어승마(御乘馬) : 임금이 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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