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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48호, 양력 : 7월 4일, 음력 : 6월 2일
[356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2] 재위기간 15년간 가축 전염병으로 소와 말(牛馬) 6만 여두가 죽은 현종(顯宗)
2019. 07. 04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가축 전염병에 관한 기사 중 가장 많이 실려 있는 우역(牛疫)은 처음 발생한 중종(中宗) 36년(1541년)이후 명종(明宗), 인조(仁祖), 숙종(肅宗), 영조(英祖), 고종(高宗) 때 까지 끊이지 않고 발생하였는데,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현종(顯宗) 대로 재위기간 15년간 24건의 기사가 실려 있으며, 기타 가축 전염병으로 나타난 기사 까지 포함하면 30건 이상이 기록되어, 역대 임금 중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종 재위 기간(1659년 5월 -1674년 8월)중 중요한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1660년 7월에 함경도 경흥 지방을 관할하던 경흥부(慶興府)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진 것을 시작으로 1663년 4월에 우역(牛疫)이 매우 참혹하게 번져 앞으로 종자가 끊길 염려마저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같은 해 9월에는 강원도와 충청도에, 10월에는 황해도 해주(海州), 곡산(谷山)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져 소 1천여 두(頭)가 죽었으며, 관청에서 기르는 돼지인 관저(官猪)도 많이 죽은데 이어, 12월에는 강원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돌아 1천 7백 70여 마리의 소가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1664년 윤달 6월에는 전라도 고부(古阜) 등 7읍에 소 전염병이 크게 번졌으며, 11월에는 개성부에 백성들에게 전염병이 극성하였는데 소의 전염병도 같이 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듬해인 1665년 8월에는 황해도 황주(黃州), 금천(金川), 서흥(瑞興)과 충청도에, 9월에는 전라도에 폐사한 소 두수가 1천 3백여 두, 11월에는 경상도에 우역이 치성하여 선산(善山)·영천(永川) 등 30여 고을에 전후 죽은 소가 6천 4백여 두, 12월에는 8개도가 우역(牛疫)이 크게 치성하여 전생서(典牲署)에서 기르던 검은 소 14두(頭)가 죽고, 충청도에서 소 2두가 죽었는데, 제주는 더욱 극심하여 희생(犧牲)을 제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2년 후인 1667년 2월에는 함경도에 우역(牛疫)이 크게 성하여 수없이 많은 소가 죽었으며, 이듬해 5월에도 함경도에 우역(牛疫)과 마역(馬疫)이 크게 퍼져 죽은 것이 1만 8천 1백여 두에 달하고, 8월에는 경기 지방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게 번져 죽은 것이 1백여 두, 9월에 함경도에 소와 말 이 죽은 두수가 2만 여두, 평안도에서는 소 2백 여두, 9월에는 황해도 평산(平山) 등 10개 읍에 소의 전염병이 번져 잇달아 죽고, 10월에는 평안도에 한 달간 죽은 두수가 560여두에 함경도는 전염병으로 죽은 수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였고, 11월에는 경기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소가 1천 6백여 두에 달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1669년 8월에는 황해도 신계(新溪)·평산(平山)·금천(金川)·토산(兎山) 등지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으며, 9월에는 평안도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이 전후 47명, 소도 돌림병으로 죽은 숫자가 1백 45두(頭)에 달하였고, 이듬해 8월에는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거의 남은 종자가 없어, 농가에서는 사람이 소 대신 밭을 갈았는데 9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 마리의 일을 해낼 수 있어 가을갈이에 가망이 없게 되었으며, 황해도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한 달 동안에 죽은 소가 8천여 두(頭)에, 11월에는 경상도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여 전후로 죽은 수가 3백여 두에 달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어 1671년 1월에는 황해도에서 여역과 우역(牛疫)이 함께 발생하고, 3월에는 함경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0여두, 6월에는 전라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3천 5백 34명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7백 25명, 함평(咸平) 등 고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백 47두, 10월에는 한양에서 여역이 조금 가라앉았으나 각도의 우역(牛疫)은 점점 치성해져 영호남 지역인 양남(兩南)과 지금의 강원도인 원양도(原襄道)가 더욱 심하였던 것으로 적고 있어, 기록상으로만 15년간 6만 여두의 우마(牛馬)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356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제향(祭享)에 쓸 흑우(黑牛)가 갑자기 죽었는데, 전염병으로 계속해서 죽어나가 일곱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아 해당 관청인 해사(該司)로 하여금 구료(救療)할 약물을 찾아보겠다는 보고에 임금이 앞으로 제향할 일이 매우 걱정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현종실록 6권, 현종 4년 6월 2일 무술 기사 1663년 청 강희(康熙) 2년

제향에 쓸 검은 소의 전염병 치료를 논의하다

약방 제조 김좌명이 아뢰기를,

"제향(祭享)에 쓸 흑우(黑牛)가 갑자기 죽었기에 신이 오늘 병들지 않은 소들을 막 여염집에 내두어 전염되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듣건대 계속해서 죽어가 일곱 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필시 소 전염병 중에서도 독한 것이라서 그럴 것이니, 해사(該司)로 하여금 구료(救療)할 약물을 찾아 보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 제향할 일이 매우 염려스럽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희생물에 재변이 생긴 것은 변고 중에서도 큰 변고이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재이(災異)로 상문(上聞)하지 않고 위에서는 수성(修省)할 뜻을 다잡지 않은 채 어떻게 하면 구료하고 계속 쓸 수 있는지만 강론하고 있으니, 임금이나 신하 모두 잘못되었다 하겠다.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4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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