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가기
제19-250호, 양력 : 7월 11일, 음력 : 6월 9일
[381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4] 병자호란(丙子胡亂)으로 소(牛)가 부족하자 몽고(蒙古)까지 찾아가 도입하였다
2019. 07. 11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소 무역은 우척(牛隻) 무역이라고도 하여 초기 태종(太宗) 대와 세종(世宗) 대에 중국에 소를 대량으로 보내고 비단인 견(絹)이나 포(布)를 받는 형태의 기사가 대부분이나 중기 이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나 정묘(丁卯), 병자(丙子) 호란(胡亂)을 거치면서 농우(農牛)가 부족하여 일부 다른 나라에서 도입한 기록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선, 태종대에는 중국에서 소(牛)를 무역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는 보고에 이어, 황제가 공문서인 자문(咨文)을 보내어 천하가 태평하여 군사와 백성들이 각각 생업(生業)을 편히 하는데, 요동(遼東)에 소(牛)가 적고, 조선은 접경(接境)하여 소가 많이 나니, 쓸 만한 경우(耕牛) 1만 필을 뽑아서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보내게 하여, 소 한 마리에 견(絹) 한 필, 포(布) 4필로 계산하고, 2부(部)로 운반하여 넘기도록 요청한 바가 있습니다.

이에 따라 조정에서는 임시 관청인 진헌색(進獻色)을 두어 소를 바꾸는 일을 맡게 하고, 중외(中外)의 관직인 시산(時散) 각 품(品)으로 하여금 품등(品等)에 따라 소를 바치게 하였으며, 자원하여 소를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 주게 하였는데, 한번에 1천두 씩 모두 10번에 걸쳐 1만두의 소를 세 달 만에 요동으로 보낸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세종 대에도 중국에서 요동(遼東)에 조선의 소 1만 마리를 교역하자고 황제가 주청(奏請)하자, 민가에 있는 소가 적고, 제주(濟州)에는 말은 많아도 소는 적으며, 민가에서 전답의 거름을 오로지 소에 의지하고 있어 육지로 내올 수 없는데, 강제로 끌어 내온다면 옳지 않은 일이라, 그 댓가를 넉넉하게 지불하고 바꾸어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고, 또한 수효를 충당할 수 없다고 주달해야 할 것인지, 소가 수놈은 적고 암놈이 많은데, 암소, 수소를 반반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암소를 많이 갖추어서 교환할 것인지도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러자 임금이 직접 나서 중국 사신에게, 조선은 황막(荒漠)한 땅이므로 모든 물건이 풍성하지 못하고, 소(牛)는 더욱 많지 못한데, 근년에는 수재(水災)·한재(旱災)로 인하여 백성들의 식량이 어려워서 굶어 죽는 것을 구제하는 데도 넉넉지 못하니, 소를 기를 만한 자력(資力)이 없고, 이로 인하여 농우(農牛)가 적으니 백성의 산업(産業)도 염려되며, 민호에 소가 있는 사람은 열 집에 한 집이 될 정도이고, 그 있는 것도 한 마리에 지나지 않을 뿐으로, 황제에게 잘 아뢰어 소 1만마리 교환을 잘 감면(減免)하도록 부탁하여, 6천 마리의 소를 보내는 것으로 조정하여 1천두씩 여섯 번에 나누어 보낸 바가 있습니다.

한편, 이러한 대규모 소 무역에 관한 기사는 이후 임금 대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다음해 선조(宣祖)대 기사에 호조(戶曹)에서 보고하기를,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어 구황(救荒)과 능군(陵軍)의 식량이 날로 감축되어 가고, 봄에 경작하지 못하였으므로 가을이 되어도 수확할 것이 없으며, 피(稷)와 조 그리고 메밀(木麥)은 그나마 지금이라도 파종할 수 있으나 경기 열읍(列邑)에는 저축된 종자가 없어, 강원도에서 피와 조 그리고 메밀 각 1백 석, 충청도에서 각 3백 석, 전라도에서 각 4백 석을 수송하게 하였고, 강원·황해도의 경우는 만곡(晩穀) 종자를 배정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으며, 특히 소에 있어서는 경기도에 이미 남은 것이 없어 중국에서 보낸 의주(義州)에 있는 농우(農牛) 21마리를 내와서 사용 한 것으로 적고 있어 부족한 농우를 거꾸로 중국에서 도입하여 활용 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381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병자호란이 있은 이듬해에 전쟁 시 국무 수행기능을 맡았던 비변사(備邊司)인 비국(備局) 관원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중국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몽골부족 중 하나인 오환 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몽골지역의 내만 왕국(乃蠻王國)에 도달한 후,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자삭도 왕국(者朔道王國),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 왕국(蒙胡達王國),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 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 왕국(所土乙王國)·빈토 왕국(賓土王國)에 도달하여 소 1백 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와, 평안도 열읍(列邑)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인조실록 36권, 인조 16년 6월 9일 경자 기사 1638년 명 숭정(崇禎) 11년

비국 낭청 성익이 소 무역의 일로 몽고에 들어가다

비국 낭청 성익(成釴)이 소를 무역하는 일로 몽고(蒙古)에 들어갔다. 심양에서 서북쪽으로 16일을 가서 오환 왕국(烏桓王國)에 도달했고, 3일 만에 내만 왕국(乃蠻王國)에 도달했다. 또 동북쪽으로 4일을 가서 도달한 곳이 자삭도 왕국(者朔道王國)이었고, 북쪽으로 가서 3일 만에 몽호달 왕국(蒙胡達王國)에 도달했고, 또 동쪽으로 가서 투사토 왕국(投謝土王國)·소토을 왕국(所土乙王國)·빈토 왕국(賓土王國)에 도달했다. 소 1백 81두를 사가지고 돌아왔는데, 평안도 열읍(列邑)에 나눠주어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게 하라고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36책 36권 45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