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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52호, 양력 : 7월 16일, 음력 : 6월 14일
[59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6] 강화도(江華道)에 1만 마리의 말(馬)을 먹일 목장을 건립하려고 하였다
2019. 07. 16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마목장(國馬牧場) 중 한양 인근의 중앙목장으로는 동쪽 근교에 위치한 살곶이목장(箭串牧場)과 양주도호부 녹양벌 일대에 자리한 녹양목장(綠楊牧場)이 있었으며, 지방 목장 중에서는 제주도 목장을 비롯해 강화도 목장, 진도 목장, 함경도 도련포 목장, 마응도 목장, 두원태 목장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이중에 강화도 목장은 태종(太宗)대에 설립되어 세종(世宗)대에는 1만 마리의 말을 기르는 목장 건립을 검토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운영방식이 바뀌면서 존속되었고, 실록에는 100여건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임진왜란 전까지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태종대에는 강화(江華)에 새 목장이 이룩되니, 둘레가 6만 7천 1백 48척(尺)이었으며, 목장(馬場)의 목자(牧子)로 그곳의 백성을 정속(定屬)시켰는데, 이들이 한번 목자(牧子)라고 칭(稱)하게 되면 종신토록 면치 못하고, 또 자손에 이르기까지도 목자란 이름을 면치 못하게 된다고 하여 유리(流離)한 자가 40여 호(戶)나 된다는 보고에, 강화의 백성들이 이사(移徙)가게 하여 온전히 목장을 만들 수 있다면 제주보다 못하지 않아, 군국(軍國)의 말로 사용하는 데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으며,

강화부(江華府) 장내(掌內)에 있는 진강산(鎭江山)·길상산(吉祥山)·북일곶이(北一串)·신도(信島)·매도(煤島) 등 5처(處)의 목장(牧場) 안에서 자식(孶息)시키는 마필(馬匹)이 암말인 피마(雌馬)· 수말인 상마(雄馬)를 합해 1천 2백여 필(匹)인데, 목자(牧子) 1명마다 피마 5필과 상마 1필을 가지고 1둔(屯)으로 삼았는데, 목자들이 잘 돌보며 기르지도 못하여 말이 번식하지 못하니, 부사(府使)로 하여금 목장을 겸하여 관리하게 한 바가 있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마정(馬政)은 군사에 중한 일로 강화에 가서 말을 먹일 장소를 살피게 하여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장을 만들 만하고, 말이 겨울을 지나도 축나지 않으면, 각 관(官)에 나누어 기르는 말을 모두 여기에 합쳐서 먹이고자 하였는데, 조사 결과 목장으로 적당한 곳이 남진강(南鎭江)에서부터 대청포(大靑浦)까지 1만 1천 6백 자(尺)이고, 서쪽으로는 건동을포(巾冬乙浦)까지 5천 8백 자로, 그 사이에 비어 있는 땅을 합쳐서 한 목장을 만들면 주위가 60리 가량으로, 1만 마리의 말을 먹일지라도 물과 풀이 모두 풍족하다고 파악되었고, 다만 겨울에는 눈이 많고 풀이 마르므로, 담을 쌓아 목장을 만들고 각 고을에 나눠서 기르는 말을 그 안에다 모아서 먹이고, 각 포구(浦口)에 영선군(領船軍)으로 하여금 풀을 베어 말려서 목장 안에 쌓아 두었다가 겨울에 먹일 준비를 하도록 하며, 목장 안에 거주하는 백성 3백 38호는 목장을 혁파(革罷)한 땅에 자원대로 이주하기를 허락하되, 그들의 전토(田土)에 담을 쌓고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는 그대로 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에도 불구하고 강화 목장(江華牧場)에 들여 놓아 기르는 말이 본래 1천 7백여 필이었으나, 2년에 걸쳐 죽은 말이 거의 60필이나 되었는데, 그 이유가 겨울철에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밝혀지자, 매년 겨울철에 들거든 목장 밖에 내어 놓아 벼 뿌리를 먹게 하거나 보리뿌리를 먹게 하는 것이 어떠냐는 논의도 있었으며, 이렇게 목장 밖으로 흩어 놓아 보리밭을 짓밟고 물어뜯게 하면 민원(民怨)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놓아기르는 수효를 줄이고, 가까운 고을로 나누어 주어서 기르게 하거나 군관(軍官)들에게 내려 주게 하는 방법도 검토가 된 바가 있습니다.

한편, 세조(世祖)대에는 강화부(江華府)의 진강(鎭江)·중장(中場)·길상(吉祥)의 세 목장은 연달아 설치한데다 각각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한계를 구분하니, 해마다 공역(功役)이 그치지 아니하고 말도 경계를 넘어 달아나서 서로 혼동되어 목자(牧子)가 분별하기 어려워 쟁송(爭訟)하기에 이르자, 3목장(牧場)을 하나로 합하게 하였으며, 강화(江革)의 장봉도 목장(長峯島牧場)에 일찍부터 호마(胡馬)를 방목(放牧)하여 따로 번식(蕃息)을 시키고 있는데, 건장한 아마(兒馬)와 수말(雄馬)이 46필(匹)로 이중에 5세(歲) 이하의 양마(良馬) 10필을 가려내어 한양으로 보내고, 나머지 수말 36필 중에 북일(北一)·진강(鎭江) 두 목장에 각각 8필씩 보내어, 감목관(監牧官)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고, 털색과 치아상태인 모치(毛齒)를 본사(本司)에 보고하여 마적(馬籍)에 등록하게도 하였습니다.

592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강화에서 목축장을 물색하여 담 쌓는 역사를 시작한다고 하는데, 마정(馬政)이 나라의 급무라고 하지마는 한재(旱災)를 당하여 백성을 역사(役事)시키는 것은 더욱 고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일로 정지하고 가을을 기다리게 하여 백성의 힘을 휴양하게 하자는 건의에 임금이 강화 목장의 담 쌓는 일을 추수 때까지 정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6월 14일 신미 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강화 목장의 담 쌓는 일을 추수 때까지 정지하게 하다

우사간 우승범(禹承範) 등이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사람의 일이 아래에서 움직이면 하늘의 변화가 위에서 응한다 합니다. 이제 농사철을 당하여 가뭄 귀신이 사나운 심술을 부리매, 전하께서 밤낮으로 크게 걱정하시어 죄수를 석방하시고 풀어 주시며, 기도하는 일에도 해야 할 신령에게는 다 하시었으니, 천재를 두려워하고 민심을 애휼하심이 극진하다 하겠나이다. 그러나 신 등은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사와 삼가 한두 가지 좁은 소견을 가지고 높으신 총명을 더럽히오니 거룩하신 재량을 엎드려 바라나이다.

1. 옛날 《춘추》에 무릇 경영하여 일으키는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기재하는 것은 백성의 노력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 등이 듣자온즉 이제 강화에서 목축장을 물색하여 담 쌓는 역사를 시작한다 하오니, 마정(馬政)이 비록 나라의 급무라고 하지마는 한재를 당하여 백성을 역사시키는 것도 더욱 고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비록 말하기를, ‘선군을 거느리고 일한다.’ 하나, 그 노역시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아직 정지하고 가을을 기다리게 하여 백성의 힘을 휴양하옵소서. (중략)

하였는데, 임금이 병조에 명하여 강화 목장의 담 쌓는 일은 추수 때까지 정지하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6권 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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