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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308호, 양력 : 1월 28일, 음력 : 1월 4일
[478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94] 학교의 관원들이 소 잡는 것을 금지하지 않아 뼈가 구릉처럼 쌓였다
2020. 01. 28 by 남인식 편집위원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공자(孔子)와 그 제자 및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들의 신위를 봉안하여 합동으로 제사하던 서원(書院)의 중심 건물로 제향을 모시는 사우(祠宇)를 뜻하는 문묘(文廟)를 수호하고 유생(儒生)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잡무를 담당하던 성균관(成均館)에 소속된 노비를 전복(典僕)이라 하였습니다.

통상 성균관 유생의 식사에 필요한 쌀은 호조(戶曹)에서 식량 등의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양현고(養賢庫)에 재원을 떼어 준 것(劃給)으로 충당하였는데, 쌀 외에 식사에 필요한 어물과 채소 등은 이들 전복이 조달하였고, 그밖에도 유생 접대에 쓰이는 땔감이나 기름 등도 다달이 상납하였으며, 이들은 문묘를 수호하는 명분을 가지고 있어 한양의 오부방민(五部坊民)에게 부과된 요역(徭役)인 방역(坊役)에서는 면제되었습니다.

이들 전복들은 잡역을 수행하기 쉽도록 동소문(東小門) 성균관 앞 관동(館洞)에 거주하였는데, 이곳을 반촌(泮村)이라 불렀고, 이곳에서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싶으나 기숙사에 자리가 없을 때 유생들이 반촌에 임시로 거주하며 공부하기도 하였으며, 성균관에 인접한 위치와 촌민이 성균관의 각종 잡역을 전담하면서 일종의 치외 법권 지역처럼 취급되었습니다.

반촌 마을 어귀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이나 가마에서 내리도록 지시한 푯돌인 하마비(下馬碑)가 있었으며,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반인(泮人) 또는 관인(館人)이라 하였고, 반인들은 모두 고려 때 찬성사를 지낸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이 국학에 헌납한 노비 100여 명의 후손으로 이들은 반촌을 형성하고 반촌의 북쪽에 제단을 세워 안향의 제삿날이 되면 제사를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 반인들은 고려의 수도 개성에서 옮겨 온 사람들이라서 그들의 말과 곡하는 소리는 개성 사람의 말투였고, 남자의 의복은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이상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기개가 높고 의협심이 있어 죽는 것을 마치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듯이 여긴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들에게는 특별히 생계유지를 위해 소의 도살 판매권이 주어져 조선 초기부터 문묘 제향(文廟祭享)에 바칠 희생(犧牲)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도사(屠肆), 즉 푸줏간을 설치해 제향에 쓰고 남은 쇠고기를 판매해 생활하도록 하였습니다.

통상 반촌에 사는 반인들은 6개월마다 번(番)을 나누어 성균관에 입역(入役)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자들은 각기 생업에 종사하였으나 주로 도축업에 종사하였고, 반촌은 반인 이외의 입주는 허락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성균관의 재원이 부족해지자 잡역 담당자인 이들에게 재정 보충의 책임을 맡게 하여, 도사는 상설 점포나 어용상전(御用商廛)인 시전(市廛) 같은 기능을 하는 현방(懸房)으로 재조직되면서 본격적인 상업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복은 쇠고기 독점 판매권을 보유한 채 현방을 운영하는 대신, 성균관 관련 역(役)을 전담해야 했는데, 형조(刑曹), 사헌부(司憲府), 한성부(漢城府) 등 사법권을 가진 삼법사(三法司)에 일종의 세금인 속전(贖錢)을 납부할 의무가 생기게 되면서, 점차 도사의 이익에 비하여 신역이 과중하여 생계가 어렵게 되었지만 유생 부양비용과 관계된 것이어서 쉽게 줄일 수 없어, 쇠고기 판매를 통한 이윤으로 한꺼번에 성균관에 일정액을 상납하고 신역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제도를 도입하여, 전복은 신역을 대행시켜 현방의 운영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성균관에 대하여 독립적인 관계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478년 전 오늘의 실록에는, 헌부(憲府)에서 사학(四學)의 관원들이 교회(敎誨)하는 데 뜻이 없어 유생(儒生)들이 전혀 모이지 않아 학사(學舍)가 늘 비기 때문에, 전복(典僕)들이 날마다 소 잡기를 일삼아 하여 뼈가 구릉(丘陵)처럼 쌓이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금지하지 않고 있으니, 각 학(學)의 장무관(掌務官)들을 파직하여 이 폐단을 개혁하기를 건의하자, 임금이 학교의 관원들이 소 잡는 것을 금지하지 않아 뼈가 구릉처럼 쌓이게 되어 지극히 부당하니, 아뢴 대로 파직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97권, 중종 37년 1월 4일 을유 기사 1542년 명 가정(嘉靖) 21년

사학의 폐단으로 각 학의 장무관의 파직을 명하다

대간이 전의 일을 아뢰었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요사이 사학(四學)의 관원들이 교회(敎誨)하는 데 뜻이 없어 유생(儒生)들이 전혀 모이지 않아 학사(學舍)가 늘 비기 때문에, 전복(典僕)들이 날마다 소 잡기를 일삼아 하여 뼈가 구릉(丘陵)처럼 쌓이게 되었는데도 조금도 금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각 학(學)의 장무관(掌務官)들을 파직하여 이 폐단을 개혁하소서."

하니, 답하였다.

"학교의 관원들이 소 잡는 것을 금지하지 않아 뼈가 구릉처럼 쌓이게 되었으니 지극히 부당하다. 아뢴 대로 파직하라.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

【태백산사고본】 49책 97권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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