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93] 명품 모피를 얻기 위해 야인(野人)들에게 소와 말을 주고 교환하였다
[559년 전 오늘 - 축산 소식93] 명품 모피를 얻기 위해 야인(野人)들에게 소와 말을 주고 교환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1.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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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09호, 양력 : 11월 22일, 음력 : 10월 15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 살았던 퉁구스계의 동북만주 원주민인 여진족(女眞族)을 ‘야인(野人)’이라고 통칭하였는데, 이중에서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인 우디케(兀狄哈, 올적합), 중국 동북부 모련위(毛憐衛)의 오랑케(兀良哈,올량합), 남만주 일대인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오도리(斡朶里, 알타리)등은 실록에도 여러번 언급되고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성종(成宗)대 이전에는 사냥이나 유목생활을 주로 하였으나, 이후 점차 농경(農耕) 사회로 발전하면서 농작물 재배 기술에 도움이 절실하여, 틈만 나면 농사에 익숙한 요동 지방의 한인(漢人)이나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는 조선 농민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농경에 투입하기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야인 사회의 농경이 발전할수록 그에 소용되는 소(牛)의 수요는 늘어났지만 우마(牛馬) 교역(交易)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이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약탈을 통해 우마를 훔쳐 가거나 아니면 몰래 교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사회는 안정화되면서 사치 풍조가 크개 유행하여 지배층 사이에서는 야인 지역의 모피에 대한 수요가 점차 증가하였고, 이렇게 조선이 원하는 모피를 야인이 원하는 우마(牛馬)와 교환하는 모피(毛皮) 교역이 점차 빈번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야인들은 우마와 철물을 제시할 때만 모피와 교환해 주었는데 조선에서는 사치가 일상이 되면서 점점 값비싸고 품질 좋은 모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는데, 특히 담비의 가죽인 초피(貂皮)는 원래 당상관(堂上官) 이상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나이 젊은 부녀자들도 모두 초구(貂裘)를 입어 수십 명이 참석한 모임에 이를 입지 않은 자가 한 사람도 없어 초구가 없으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유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초피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우마와 철물은 야인사회로 급속도로 유출되었고 야인 사회는 더욱 빠른 속도로 농경화를 이루어 경제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으며, 조선에서는 모피를 마련하라고 독촉하는 변방 수령의 침탈을 감당하지 못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인 양계(兩界) 지역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야인들의 땅으로 도망가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야인들은 교역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충당할 수 있게 되자 조선에 협조할 필요가 없게 되면서 조선은 그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북방 군사력은 약화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559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관사(館舍)에 머물고 있던 이들 야인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주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세조실록 18권, 세조 5년 10월 15일 계해 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풍양 이궁에 이르러 왜인·야인·좌상 대장·우상 대장 등에게 술과 고기를 내리다

어가(御駕)가 풍양(豊壤)의 이궁(離宮)에 이르러, 관사(館舍)에 머물고 있는 왜인(倭人)에게 돼지 1구(口), 술 10병을, 야인(野人)에게는 돼지·사슴 각 1구(口)와 술 20병을 내려 주었다. 또 좌상 대장(左廂大將)·우상 대장(右廂大將)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7책 18권 3장

【주】풍양(豊壤) : 경기도 양주의 옛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