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년 전 오늘 - 축산 소식97] 과거(科擧) 시험에서 말채찍을 놓치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
[548년 전 오늘 - 축산 소식97] 과거(科擧) 시험에서 말채찍을 놓치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8.11.2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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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113호, 양력 : 11월 28일, 음력 : 10월 21일

[팜인사이트= 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시대 과거(科擧)에서 가장 큰 특징은 무과(武科)를 시행한 것으로 태종(太宗) 대에 처음으로 시행한 이후에 문과(文科)와 함께 양반 관료 체제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무과는 기본적으로 고위 무관을 선발하기 위한 시험이었으나 기존 관리나 군사들이 무과에 합격할 경우에는 승진이나 관직 임용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과 시험에서 무재(武才)를 시험하여 인재를 등용하는 시취(試取)의 중요한 과목중의 하나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기사(騎射)였습니다. 말을 타고 쏘는 화살은 둥근 과녁인 적(的)에 맞히도록 하였는데, 과녁에서 50보(步)나 180보 또는 200보 떨어진 거리를 말을 가로질러 달리면서 활을 쏘도록 하였습니다.

통상 기사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목표를 맞히거나 상대방과 대련하는 두 가지 형식이 있었는데, 세종(世宗) 대에 과녁을 좌, 우로 나누어 세우고 말을 몰아 두 번 왕복하면서 다섯 차례 활을 쏘아 맞히는 것으로 체계가 정립되었습니다.

그러나 기사 중에 ①말을 빨리 몰지 않거나 ②활시위를 가득 당기지 않은 자 ③말채찍을 놓치는 자는 점수를 주지 않았으며, 팔을 바꾸어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힌 경우에는 점수를 인정하였습니다. 기사법은 이후 개정을 거쳐 국왕이 친림(親臨)하여 무과(武科)의 전시(殿試)를 치르는 의식인 무과전시의(武科殿試儀)에 명문화되었으며, 조총(鳥銃)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표적인 무예의 하나로 인정되었습니다.

548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무과(武科)를 시험하였는데, 2백 보(步)의 거리에서 기사(騎射)하게 하고 경서(經書)를 강(講)하게 하여 13인을 뽑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종실록 8권, 성종 1년 10월 21일 을축 기사 1470년 명 성화(成化) 6년

모화관에 거둥하여 관문에 나아가 무과를 시험하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문(館門)에 나아가 무과(武科)를 시험하였는데, 2백 보(步)의 거리에서 기사(騎射)하게 하고, 격구(擊毬)하게 하였으며, 사서(四書), 오경(五經),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에서 스스로 원하는 한 가지 책을 강(講)하게 하여 겸사복(兼司僕) 이계동(李季仝) 등 13인을 뽑았다.

【태백산사고본】 2책 8권 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