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훈장 받은 숲은 뭐가 다를까
국민훈장 받은 숲은 뭐가 다를까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8.12.3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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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지로 각광받는 대나무 숲 전경.
영화 촬영지로 각광받는 대나무 숲 전경.

산은 주인을 닮는다. 산주가 부지런하면 산도 치열해지고 산주가 느긋하면 산도 여유를 부린다. 웅장한 산이 있는가 하면 아기자기한 산도 있다. 산은 시간과 사람의 손길을 먹고 자란다.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산은 거칠다. 산에 관록이 느껴지면 시간을, 세련미가 돋보이면 사람의 손을 탔다는 증거다.

부산 기장군에 위치한 아홉산 숲을 한 바퀴 휘돌면 치열하면서도 여유가 있다. 빽빽한 나무는 치열함을, 성긴 여백은 느긋함을 보여준다. 수백 년 된 고목과 하늘을 반쯤 가린 대나무 숲, 널찍한 임도의 조화는 세련됨을 넘어 숲의 웅장함을 선사한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400년 전 그대로다.


시간으로부터 고집스럽게 지켜낸 숲

문백섭 대표
문백섭 대표

남평 문 씨 가문은 고집스럽게 산을 지켰다. 1600년대 부산 기장군 아홉산 숲에 자리 잡은 후 400여 년간 숲을 지켰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수백 년 된 금강송 군락지, 주먹만 한 굵기의 빽빽한 대나무숲, 구갑죽과 토종 향나무는 세월이 지나간 자리도 비껴 나갔다.
 
아홉산 숲의 풍경은 그저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일제 강점기 산과 나무를 뺏길 위기에서도 놋그릇을 숨기는 척하며 놋그릇만 빼앗기는 기지를 발휘해 지켜낸 보물들이다. 일제의 손길에서 벗어난 아홉산 숲의 금강 소나무들은 그래서 송진 채취 흔적이 없다. 9대 종손인 문백섭 아홉산 숲 대표(61)는 선대의 과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조상님들은 산과 나무에 대한 애착이 정말 강했습니다. 과거 월동 준비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땔감으로 잔가지만 골라 채취했지요. 큰 나무는 절대 베지 않았어요. 어떻게 보면 집단 노동을 활용해 전정 작업을 한 것이죠. 마을에 어렵게 사는 노인들에게는 공동으로 작업한 나무를 제공하기도 했고요."

 

아홉산 숲의 시그니처 구갑죽 모습. 1960년대 문 대표의 선친이 심었다.
아홉산 숲의 시그니처 구갑죽 모습. 1960년대 문 대표의 선친이 심었다.

문 씨 일가의 나무 사랑에 마을 사람들도 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혹여 큰 나무가 잘려 있으면 문 대표의 조상들은 잘린 나무 밑동을 잘라 마을을 돌아다니며 일일이 맞춰보며 나무 자른 이를 색출하기도 했다. 산과 나무는 그들에게는 보물 이상의 가치였으며 지켜야 할 혼과 같은 존재였다.
  
"산이 산주를 닮는다고 하죠. 문 씨 일가의 우악스러운 고집이 산에 그대로 베어 있어요. 아홉산 숲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고집이죠."
  
아홉산 숲은 부산시의 보물 같은 존재다. 부산에는 이상하리만치 어엿한 산이 드물다. 독림가도 문 씨 일가에서 유일하게 배출하고 있다. 지금은 그나마 상황이 나아져 지근거리의 치유의 산과 함께 아홉산 숲이 에코벨트를 형성하며 지역 명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홉산숲 대나무는 한 손으로도 절반도 감싸지 못한다.
아홉산숲 대나무는 한 손으로도 절반도 감싸지 못한다.


숲의 호젓함을 느끼는 공간
  
"매주 월요일은 숲이 휴식을 취하는 날이에요."
 
아홉산 숲은 월요일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다. 백 대표는 이날을 숲의 공휴일로 명명한다. 숲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산이 곁을 내주면 잠시 쉬어가는 존재다. 아홉산 숲 경영은 산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방제도 하지 않는다. 정부에서 하는 항공방제도 아홉산 숲은 비켜간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는 연습이다. 아홉산 숲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은 늘 모기에 쫓긴다. 대나무 속의 약을 치치 않은 텅 빈 공간은 장구벌레가 서식하는 최적의 생태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독 이곳에 모기가 많은 이유다. 

     
"친환경 모기퇴치기를 구비하기는 하지만 여름에는 정말 모기가 많아요. 그만큼 자연 그대로라는 반증이겠죠."

아홉산숲에 사는 다람쥐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아홉산숲에 사는 다람쥐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다.

아홉산 숲은 조용하다. 방문객들에게 요구하는 개념부터 다르다. 유원지나 관광지가 아니다. 입장객들이 지켜야 하는 철칙이 있다. △소리 내지 않기(핸드폰, 블루투스 등) △등산용구 반입금지 △반려동물 입장 금지 △식물 훼손 금지 등이다. 생태계에 방해되는 모든 행위는 반려된다.

인공적인 소리는 숲에 서식하는 모든 동식물들에게 스트레스다. 반려동물이 숲에 들어오면 자연생태계는 긴장하고 금이 간다. 아홉산 숲이 내건 규칙을 지키면 비로소 자연이 들린다. 대나무 잎들이 바람을 타는 소리, 빽빽한 풀숲 사이로 족제비가 풀을 헤치는 소리, 딱따구리가 나무를 긁는 소리.
  
"자연 중심주의죠. 방문객들은 숲이 주는 호젓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자연 시간표를 거스르는 게 아니라 따라갈 때 비로소 자연이 들리고 볼 수 있어요."
 

아이들이 흙을 묻혀 돌아가는 곳
 
교육자들은 늘 고민이다.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좀처럼 공부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선생님들이 늘 새로운 교육법에 목말라하는 이유다. 부산에 있는 교육자들이 중지를 모았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선생님들은 자연과 아이들을 연결하고 싶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교사들의 모임(환생교)이 조직됐다. 환생교 선생님들은 아홉산 숲을 가꾸는 문 대표를 찾았다. 문 대표는 기꺼이 숲을 내줬다.

숲에서 이뤄지는 생태학습 교육이 태동한 배경이며 아홉산숲생명공동체가 만들어진 취지다. 2005년 8월 8일 공동체는 정식 출범하고 자연환경에 적합한 생태체험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아이들을 위한 숲속 놀이터.
아이들을 위한 숲속 놀이터.

나무를 오르는 황토색 다람쥐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를 제공하죠. 최근 숲 유치원 등과 같은 교육이 인기잖아요. 부산의 의식 있는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아홉산숲생명공동체를 만들었어요."
  
이후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문의가 빗발쳤다. 숲 교육이 입소문을 타면서 아홉산숲 주차장에는 노란색 대형버스가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됐다. 신나게 노는 아이들은 문 대표에게 울림을 줬다. 아이들은 만지고 넘어지고 뒹굴면서 자연과 교감했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지루할 틈을 제공하지 않는다. 숲이 가진 에너지다. 단순한 일일체험이지만 아이들은 신나게 놀면서 도시의 기운을 발산하고 숲의 기운을 머금고 돌아갔다.
  
"그때는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했지만 일 좀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바로 산을 지키는 이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부산은 산을 체험하기 힘든 도시예요. 체험할 수 있다는 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줄 수 있더라고요. 아이들은 온몸에 흙을 묻히고 도시로 돌아가요."


디지털에 담지 못하는 풍경
 
아홉산숲은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영화 '군도', '대호', '협녀, 칼의기억'을 찍었고 드라마 '달의연인', '옥중화', '라이프온마스'와 같은 인기 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았다. 드라마 방송작가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집요하게 촬영 장소를 섭외했다. 지인을 활용한다거나 공공기관을 두드리는 식이다.
 

영화, 드라마 촬영지 소개 안내판.
영화, 드라마 촬영지 소개 안내판.


 "사실 산을 내어줄 생각은 없었는데 아는 지인이 배우 일을 하면서 감독의 간곡한 부탁이라는 거예요. 우연찮은 인연으로 시작됐는데 한번 시작하니 예술계 쪽에서 계속 연락이 오더라고요. 산의 아름다움을 담는 일인데 거절하기도 힘들고. 숲의 아름다움과 힐링을 알리는 데 일조했죠."
  
영화나 드라마에 담긴 아홉산숲 대나무 군락지는 때론 신비하게 때론 몽환적으로 묘사됐다. 디지털의 색감은 자연을 과장되게 표현하기도 하고 축소해 표현하기도 했다. 줄거리에 맞도록 각색된 자연이었다. 아홉산 숲이 디지털에 담기고 전파를 타면서 유명세를 치렀지만 진짜 자연은 담지 못했다.
  
"직접 숲에 가서 나무의 감촉, 바람소리, 새소리, 산짐승 풀 헤치는 소리를 들어봐야 한다니깐요."
 

대나무 숲 위에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흩날려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대나무 숲 위에는 바람에 나뭇잎들이 흩날려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고기 굽는 관광객, 낙서하는 아이
 
"등기부등본을 떼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숲에서 고기를 굽고 술을 즐기는 관광객을 제지했더니 문 대표가 관광객으로부터 들은 얘기다. 숲을 지키다 보면 욕설 듣는 일은 일상이다. 산을 오르는데 입장료를 받는다고 화내는 등산객도 부지기수다.

법에 금지된 임산물 채취는 기본이고 나무를 훼손하거나 대나무에 낙서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집에 나무를 심겠다고 뿌리째 뽑아가는 일도 있다. 아무리 현수막을 내걸고 계도를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낙서가 된 대나무는 전부 베어버려요. 참 마음이 아프죠. 몇 백 년 동안 가꾼 곳인데 살아있는 생명체를 단번에 잘라 버리는 게요. 어쩔 수 없어요. 아직까지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소양이 안됐다는 거겠죠. 마치 나무가 자신의 소유인 양 생각하는 행태가 안타깝습니다."
 

낙서를 금지하는 현수막.
낙서를 금지하는 현수막.


산림은 공공재,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복지로 접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림은 공공재라는 게 문 대표의 생각이다. 자연이 주는 혜택은 누구나 누려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산에 올라 가족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도 산이 주는 효용이다.
 
"사람은 굉장히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이곳에 어린이들을 위한 숲속 놀이터를 만든 이유죠. 숲에 대한 보편적 복지 개념을 강구해야 합니다. 산은 인문학적, 문화예술적 효용도 있습니다. 미술 전시회, 음악회 등도 지속적으로 개최할 계획입니다."
 
아홉산 숲은 2003년 산림청으로부터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됐다. 2016년에는 수령 400년 이상의 수목 116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됐다. 2018년 ‘산의날’ 행사에서 가문 대대로 산림복지에 기여한 공이 인정돼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산을 가꾼다는 건 힘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을 지키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 씨 가문의 고집이랄까요.”
 

아홉산 숲의 널찍한 임도.
아홉산 숲의 널찍한 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