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3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7] 큰 길(大路) 폭은 우마(牛馬)가 끄는 수레 일곱 바퀴를 기준으로 하였다
[393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7] 큰 길(大路) 폭은 우마(牛馬)가 끄는 수레 일곱 바퀴를 기준으로 하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7.1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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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53호, 양력 : 7월 19일, 음력 : 6월 17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 왕조실록에 수레와 관련된 기사는 2천여 건으로 일반적으로 사람이 타는 수레(輿)에서부터 짐을 싣는 수레인 거자(車子), 손으로 끄는 작은 수레인 편차(便車), 앞에 작은 바퀴를 달아 쉽게 방향을 돌릴 수 있게 만든 수레인 곡차(曲車), 소나 말이 끄는 우거(牛車), 마차(馬車), 말 4필이 끄는 수레인 승(乘), 소 2필이 끄는 대차(大車), 밭에서 쓰는 달구지인 전차(田車), 전쟁시 화약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할 때 쓰던 수레인 화차(火車), 휘장을 친 수레인 치차(輜車), 임금의 사신(使臣)이 타는 가벼운 수레인 유거(輶車), 높은 벼슬아치가 타는 수레인 관개(冠蓋), 덮개가 높아 서서 탈 수 있는 고차(高車),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던 수레인 초헌(軺軒)등이 나타나 있으며,

특히 임금이 타는 수레는 연(輦), 대가(大駕), 승여(乘輿), 용어(龍馭), 황옥(黃屋), 봉련(鳳輦), 연곡(輦轂), 금란(金鑾), 난로(鸞輅), 난거(鸞車), 난여(鑾輿), 옥여(玉輿), 가전(駕前), 육비(六飛)등 다양한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고, 왕후의 수레인 어헌(魚軒), 왕비의 수레인 적로(翟輅), 적불(翟茀)외에 상례(喪禮)시 대비의 관(棺)을 실은 용순(龍輴), 구(柩)를 싣는 수레인 신위(蜃衛) . 예로(鷖輅), 혼백을 모시는 수레인 혼어(魂馭)등도 기사에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수레와 관련된 기사 중 우마(牛馬)와 관련된 중요 기사 내용은 우선, 태종(太宗)대에는 명나라 조정의 관리들이 무역으로 보낸 말값(馬價)을 가지고 왔는데, 화려한 무늬의 비단인 문기(文綺), 견(絹), 면포(緜布) 9만여 필과 약재를 수레 1백 50량과 소·말 3백 필을 써서 한양으로 실어들인 바가 있으며, 세종(世宗)대에는 조정에 있는 관리가 죽어서 그 고향에 돌아가 장사지내려 하거든, 지나가는 고을의 관역(館驛)에서 소와 수레를 주어 그 집에까지 보내 주도록 하였으며, 제사는 국가의 중대사로 대소(大小) 제향에 쓸 짐승은 깨끗한 곳에서 기르는데, 담을 쌓고 문을 달아 다른 짐승들과 섞이지 않게 하여 깨끗하고 살찌게 하고도, 짐승을 바칠 때 소에 싣기도 하고, 사람이 지기도 하여, 깨끗하지 못하고 더럽게 되어 정성을 쏟고 공경을 드리는 뜻에 어긋나니, 선공감(繕工監)에 상자가 장치된 수레를 만들어 싣기 어려운 제사소(祭牛) 외에는 염소나 양이나 돼지는 수레로 실어 나르게 하였습니다.

또한, 한양의 도로 제도를 상고하면서, 중국 주례(周禮)에 천자는 남북으로 아홉 수레바퀴(軌)의 길을 통하게 하고, 제후는 남북으로 일곱 수레바퀴의 길을 통하게 하고, 빙 둘러서(環)는 다섯 수레바퀴의 길을 통하게 하고, 들(野)에서는 세 수레바퀴의 길을 통하게 하였으니, 큰 길은 일곱 수레바퀴가 되어야 하고, 도성 안의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는, 들에서의 세 수레바퀴 길의 법에 따라, 중로는 두 수레바퀴, 소로는 한 수레바퀴로 하되, 그 양쪽 가의 수구(水溝)는 계산에 넣지 않는 것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세조(世祖)대에는 충주(忠州) 단월역(丹月驛)에서 양재역(良才驛)에 이르기까지는 도로가 평탄(平坦)하여 수레(車)가 다닐 수 있으니, 선공감(繕工監)에서 수레를 4대씩 만들어 역(驛)마다 주어 잡물(雜物)을 수송하게 하고, 양재역(良才驛)에서 단월역(丹月驛)에 이르기까지 여러 역(驛)이 조잔(凋殘)하니, 역(驛)마다 부호(富戶) 20호(戶)를 뽑아 주어서, 역마(驛馬)가 부성(阜盛)하여질 기간까지 번(番)을 갈아서 역사(役事)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연산군(燕山君) 대에는 연향(宴享) 때에 쇠고기를 쓰지 않았음은 농사를 위해서이나, 연향은 여느 일과 다르니 써도 무방하도록 하게 하였고, 소가 병들거나 늙어서 농토에서 일할 수 없는 것은 한성부(漢城府)가 외방에서는 소재관(所在官)이 검험(檢險)하여 낙인(烙印)해 주고, 잡아서 가죽을 벗긴 뒤에 관가에 신고하면, 다시 검험하여 가죽에 낙인하여 절계(節季)마다 본주의 이름 및 소의 수를 개록(開錄)하여 모든 연향에 쇠고기를 쓰니, 왕실의 기녀(妓女)인 흥청(興淸)을 공궤하는 데에도 다 쇠고기를 쓰고, 날마다 10여 두(頭)를 잡아 수레로 실어 들였으며, 노상에 수레를 끌거나 물건을 실은 소까지도 다 빼앗아 잡으니, 백성이 다 부르짖어 곡(哭)하였고,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바치게 하되, 가까운 도(道)에서는 날고기로, 먼 도에서는 포(脯)를 만들게 하였는데, 임금이 소의 태(胎)를 즐겨 먹으므로 새끼를 낳은 배가 부른 소는 태가 없을지라도 잡히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393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경기도 등 세 도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한 수레를 만들기 위한 재목을 기일 안에 올려 보내도록 하였는데, 근래에 와서 끌어 나르는 돌들이 모두 부피가 크고 또한 장마를 겪고 나서 달구지가 한 번 갔다가 오기만 하면 고물이 되어, 고장나는 대로 곧바로 수리를 하여야 하는데 재료가 이미 떨어졌으니, 관륜목(寬輪木) 5백 개와 윤판(輪板) 3백 쪽을 경기로 하여금 속히 바치도록 건의하고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중초본] 166권, 광해 13년 6월 17일 정해 기사 1621년 명 천계(天啓) 1년

경기도에 수레를 만들 관륜목과 윤판을 속히 바치라 명하다

영건 도감에서 아뢰었다.

"경기도 등 세 도에서 거두어들이지 못한 수레를 만들기 위한 재목을 기일 안에 올려 보내라는 일은 이미 유시를 내렸습니다. 근래에 와서 끌어 나르는 돌들이 모두 부피가 크고 또한 장마를 겪고 나서 달구지가 한 번 갔다가 오기만 하면 곧 고물이 되고 맙니다. 고장나는 대로 곧바로 수리를 하여야 하는데 재료가 이미 떨어졌으니 진실로 답답한 일입니다. 황연도(黃延道)와 공홍도(公洪道)는 길이 꽤 멀기 때문에 제때에 와서 바치기가 어려운 형편이니, 관륜목(寬輪木) 5백 개와 윤판(輪板) 3백 쪽을 경기로 하여금 속히 바치도록 〈경기 감사에게 유시를 내려 신칙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태백산사고본】 56책 56권 8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