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9] 조선시대 젖소는 송아지 분만 후 유즙(乳汁)을 생산하는 농우(農牛)였다
[592년 전 오늘 - 축산 소식239] 조선시대 젖소는 송아지 분만 후 유즙(乳汁)을 생산하는 농우(農牛)였다
  • 남인식 편집위원
  • 승인 2019.07.2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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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255호, 양력 : 7월 23일, 음력 : 6월 21일

[팜인사이트=남인식 편집위원] 조선왕조실록에 젖소(乳牛)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아 10여건에 불과하고, 주요 내용도 왕실에 필요한 우유(乳汁)를 공급하는 것과 관련이 되어 있는데, 병조(兵曹) 산하 사복시(司僕寺)에 타락색(駝酪色)이라는 부서에서 우유에 대한 관리를 담당하며, 지금의 젖소 품종과는 다른 일반 농우(農牛)를 국가에서 사육하거나 민가로부터 징발하여 분만 후 우유를 이용하였고, 착유시에도 송아지를 자연 포유(哺乳)시키다가 궁중에서 쓰이는 어약(御藥)을 조제하던 내의원(內醫院) 의관(醫官)들이 우유를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젖소에 관한 임금 대 별 주요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은데, 우선, 태종(太宗)대에는 각도(各道에서 나누어 번식시킨 망아지와 말(駒馬)이 모두 1백 94필(匹)로 왕실의 마구간인 내구(內廐)에 충용하게 하자는 건의를 받고, 소(牛)도 길러서 국용(國用)에 이바지함이 마땅하다고 하니, 이 말(馬)을 소로 바꾸어 기르는 것은 어떠냐고 물어, 희생(犧牲)과 유우(乳牛)가 떨어지면 민가에서 가져다 쓰는데, 소를 많이 기르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법으로 양마(良馬)를 택하여 내구에 충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소로 바꾸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기근이 들어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각전(各殿)에 공상(供上)하던 소나 말의 젖인 종락(湩酪)을 감하고, 그 나머지 여러 곳의 종락은 모두 없애게 하면서, 인하여 젖소(乳牛)를 줄여 경기도 강화 장풍도(長豊島)에서 치게 하고, 젖을 짜던 말도 다 한양 동쪽 호곶이(壺串)에서 방목하게 하였습니다.

세종(世宗)대에는 왕실에 우유를 공급하는 일을 보던 관청인 유우소(乳牛所)를 오로지 위에 지공(支供)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는데, 모든 인원 2백 명이 매년 전직한 후 승직하여 5품에 이르러 별좌(別坐)가 되니,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를 상고하지 아니하고 이름만 있으며 실상은 없는 일로, 유우소를 혁파하여 상왕전에 지공하는 유우(乳牛)는 인수부(仁壽府)에 소속시키고, 주상전에 지공하는 유우는 예빈시에 소속시키게 한 후, 그 여러 인원은 소재한 주·군의 군(軍)에 보충하게 하였고,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傳旨)하여 임금의 형님인 양녕 대군에게 청주(淸州)에 있는 국고(國庫)의 묵은 쌀과 콩으로 젖 짜는 소를 사서 날마다 우유를 받아 먹이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재(旱災)가 경기(京畿)가 더욱 심한데, 요역(徭役)이 번다하고 과중하여 백성들이 생계를 유지하지 못한다고 하자, 옮겨서 정할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다른 도(道)로 옮겨 정하고, 감(減)할 것은 적당하게 감하게 하면서, 분예빈(分禮賓), 전구서(典廐署)의 젖소를 먹이는 곡식과 풀과 연료, 나무 같은 것도 그 수량이 대단히 많아서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니, 각사(各司)에서 기르는 잡축(雜畜)은 호조(戶曹)·예조(禮曹)로 하여금 함께 의논하여 적당히 감하게 하였습니다.

단종(端宗) 대에는 황해도(黃海道) 여러 고을에 소 2백 5두(頭)를 나누어 기르고 있으나, 젖소(乳牛)는 없고 희생(犧牲)으로도 합당하지 않으며 꼴과 콩만 헛되게 소비하고 있으니, 점마 별감(點馬別監)으로 하여금 살찌고 튼튼하여 수레를 끌 만한 것은 뽑아 사복시(司僕寺)에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관찰사에게 주어서 빈민(貧民)으로 농우(農牛)가 없는 자에게 균급(均給)하게 하였으며, 사복시의 젖소도 모두 경기(京畿)의 민호(民戶)에서 색출(索出)한 것으로,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고 혹은 젖(乳汁)이 나지 않는 까닭에 다시 민간에서 구하여 그 폐단이 무궁(無窮)하니, 여러 목장의 어린 말(兒馬)로써 암소 60우와 황소 10두를 사서 경기(京畿) 양성(陽城)의 괴태 길곶이(槐台吉串) 목장에 놓아 기르고, 젖소를 골라 본사에서 길러 민폐(民弊)를 덜게 하였습니다.

한편, 성종(成宗) 대에는 사복시(司僕寺)에서 소의 유즙(乳汁)이 다하면 그 소들을 경기(京畿) 고을의 백성들 젖소(乳牛)와 마음대로 바꾸어 백성들이 자못 이를 괴롭게 여기니, 여러 고을에 나누어 기르는 소를 면포(綿布)와 서로 교환하는 화매(和賣)를 하되, 백성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암소(牝牛) 70두(頭)와 바꾸어서, 경기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기르게 하며 취용(取用)하게 하고, 만약 또 부족하면 여러 섬의 소를 젖소와 바꾸어 나누어 기르게 하여서 쓰임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592년전 오늘의 실록에는 우유 짜는 젖소를 줄이도록 임금이 명한 것으로 적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6월 21일 무인 기사 1427년 명 선덕(宣德) 2년

젖소를 줄이도록 명하다

우유 짜는 젖소를 줄이도록 명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2책 36권 26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