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 역사 속으로⑨] 축산자조금 좌절과 성공의 역사-1
[팜 역사 속으로⑨] 축산자조금 좌절과 성공의 역사-1
  • 옥미영 기자
  • 승인 2018.05.23 10:21
  • 호수 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80년대 故 박영인 박사 국내에 자조금 알려

축산부문 자조금 어떻게 시작됐나

국내 자조금 제도는 축산분야의 자조금 도입 및 발전과정과 역사를 같이한다. 1992년 축산(양돈, 양계)에서 가장 먼저 도입되어 과도기를 지나 현재 농업계 품목을 통틀어 가장 활발한 자조금 사업을 진행하는 업계가 바로 축산이기 때문이다.

1980년 들어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 성장과 더불어 국민 소득이 증가하자 단백질 수요가 급증했다. 하지만 공급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진 가운데 UR협상이 시작되며 농업분야의 본격적인 시장 개방이 예고됐다.

개방화시대 국내산 축산물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품질고급화와 생산성 향상 등 1차적 노력뿐 아니라 홍보와 마케팅 그리고 시의적절한 다양한 연구사업을 진행할 수 있는 씨드머니(seed money), 종잣돈의 필요성 에 봉착한 것이다.

자조금 도입에 앞장섰던 故 박영인 박사의 생전 모습.
자조금 도입에 앞장섰던 故 박영인 박사의 생전 모습.

자조금 사업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은 故 박영인 박사다. 국내 농업 및 축산과 관련된 외국기관에 근무하던 1970년대 박영인 박사는 당시 외국의 농가들이 스스로 자금을 조성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현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자조금 제도를 국내에 도입하기 위해 골몰했다.

자조금 도입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나선 박영인 박사는 1985년 국내 농축산분야 지도자와 공무원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자조금 사업을 직접 시찰하게 하는 등 축산지도자들로 하여금 자조금 제도에 눈뜨게 한다.

특히 그는 1990년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이하 농발법)에 자조금 관련 문구를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가장 먼저 규모화를 이룬 양돈과 양계부문에서 임의자조금 사업을 시작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축산자조금의 마중물 ‘낙농자조금’

1992년 양계와 양돈부문에서 처음 시도된 자조금은 농발법 속의 자조금 관련 규정을 활용해 첫 사업을 시작했지만 소수의 농가들만이 참여하는 임의자조금으로 추진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자조금 사업에 대한 공감대 부족으로 무임승차 논란이 지속되면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만 것이다.

최초의 축산부문 자조금 사업은 결국 실패로 귀결됐지만 또 다른 품목에서 의 자조금 사업 시작과 의무자조금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 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자조금 사업에 대한 논의는 1998년 낙농육우협회가 자 조금 사업 추진을 결의하면서 다시 점화됐다.

1998년 5월 당시 심각한 우유수급불균형으로 인해 남아도는 우유 문제해결 방안으로 농식품부가 원유가격 5% 인하를 제안하자, 낙농육우협회는 이에 반발하면서 수용을 거부했다.

수급불균형을 공급물량 감소로 타개해보려는 정부의 결정에 대해 낙농가 들은 소비확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1㎏당 5원씩 3개월간 한시적으로 거출하는 자조금을 활용해 소비를 확대하겠다는 대안을 제시한 것.

이듬해 본격적인 거출논의가 시작된 낙농자조금은 찬반 논란이 많았지만 치열한 토론과 여론 수렴과정을 거쳐 결국 낙농육우협회 주관으로 원유 1kg당 1원씩을 임의자조금을 납부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진통 끝에 시작된 낙농분야의 임의자조금은 막상 뚜껑을 열자 이전에 실패 했던 양돈, 양계와 달리 ‘대박’을 터트렸다. 1999년 당해 연도에 낙농가의 무려 83%가 참여하면서 농가 조성규모만 16억 6천만원에 달했다.

낙농자조금이 빠른 시일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높은 참여, 즉 거출률에 있었다. 우유의 경우 집유와 가공이라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상품으로 출시되는 특성상 유가공조합과 유가공업체를 통한 자조금 거출이 임의자조금의 한 계를 보완한 것이다 농발법에 의거한 정부 지원 보조금을 합해 수십억여원이 조성된 낙농자조금은 유명 연예인들을 활용한 TV와 라디오 등 대중매체를 통한 공익광고로 방영됐고 자연스럽게 자조금이 홍보되면서 농가들의 참여를 더 쉽게 이 끌어 낼 수 있었다.

‘의무자조금 시대’ 서막을 열다

자료: 각 축종별 자조금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자료: 각 축종별 자조금관리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낙농자조금의 사업성과를 곁에서 지켜본 축산단체들은 큰 자극을 받게 됐고 의무자조금 도입을 위한 입법 활동에 돌입하게 된다. 여기에 낙농자조금사업 역시 사업실시 초기에는 80% 이상의 낙농가가 참여하는 성과를 보였지만 갈수록 참여비율이 낮아지는 등 임의자조금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축산업계 전반에 의무자조금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은 더욱 무르익어갔다.

국내 자조금 제도를 처음 소개한 박영인 박사는 1992년 한국농업자조금연구회를 발족시켜 자조금의 제도화와 각종 입법화에 큰 힘을 실었고 2000년 한우·낙농·양돈·양계협회가 공동 명의로 국회에 축산업자조금법 재정에 관한 청원을 제출하는 등 의무자조금 입법 과정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다.

의무자조금도입을 위해 4개 축산단체와 자조금연구회가 적극적인 청원운동을 펼친 끝에 2001년 국회에서는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결국 의무자조금 도입을 위한 ‘축산물 소비촉진 등에 관한 법률(이하 축산자조금법)’이 2002년 5월 13일 제정되기에 이른다. 2002년 11월에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제정되면서 의무자조금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됐다.

축산자조금법은 각 축종별 축산단체의 주관 하에 의무자조금을 도입할 수 있는 근거를 규정하고, 축산단체가 의무자조금 제도를 도입하고자 할 경우에는 대의원 투표를 거치는 등 축산농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민주적인 조성과 관리를 명문화했다.

무엇보다 임의자조금으로 시행되는 사업은 농가들의 참여를 강제할 수 없어 중도에 이탈하거나 중단되는 실패를 감내해야 하지만 의무자조금법을 도입함으로써 모든 농가의 참여를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업계는 크게 고무됐다.

의무자조금의 첫 단추는 양돈에서 시작됐다. 과거 임의자조금제도의 실패를 경험한 양돈농가들은 의무자조금제도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농가 숫자도 정예화 되어 있어서 자조금사업이 순조롭게 추진됐다.

법안이 발효되자마자 자조금 도입을 준비한 농협과 양돈협회는 2003년 11월 대의원 선거를 실시해 193명의 대의원을 선출하고 뒤이어 창립 대의원 총회를 개최해 의무자조금 거출여부와 400원의 거출금액을 확정지었다. 2004년 4월부터 출하하는 모든 돼지에 대해 400원의 자조금을 거출하기 에 이른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