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2] 사라지는 기록 下 - [포토 추적기] 양곡 유통의 기록공책
[기획연재 2] 사라지는 기록 下 - [포토 추적기] 양곡 유통의 기록공책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8.11.06 0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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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유통 역사와 양곡도매시장의 이삿날
1961년 5월. 서울시내 영세민에게 양곡을 배급하는 모습.
1961년 5월. 서울시내 영세민에게 양곡을 배급하는 모습.

[팜인사이트=박현욱 기자]

우리나라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의 시설이 파괴됐다. 전쟁으로 인한 국가 기반시설 파괴는 국민들의 생존을 위협했고 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 당연히 식량조달 문제가 국가의 최우선 과제였다. 당시 정부는 쌀을 중심으로 녹색혁명 등을 주도하며 식량증산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전쟁 후유증으로부터의 탈출은 자연스럽게 식량이나 갖가지 생필품이 유통되는 시장 재건부터 시작됐다. 지금의 서울 황학동 부지에 가장 번성했던 성동시장이 6.25 전쟁으로 파괴되자 상인들은 가건물을 올려 장을 열었고 지근거리에 다시 위치를 옮겨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후 성동중앙시장으로 간판을 새로 단 중앙시장은 국내 최대 쌀 거래장소가 됐다.

당시 이렇다 할 고속도로조차 없었던 우리나라는 강나루와 기차역을 중심으로 물류가 발달했다. 서울 용산 기차역은 지방에서 모여든 쌀과 잡곡이 집하되는 최적의 장소였다. 지방에서 출발한 양곡은 용산 기차역이 거점이 돼 한데 모였고 양곡상인들은 용달차를 이용해 용산역에서 출발해 중앙시장으로 양곡을 날랐다.
 

1965년 용산역 창고 쌀 반출광경 모습.
1965년 용산역 창고 쌀 반출광경 모습.

1950년대 중앙시장은 서울 시민이 소비하는 양곡의 70%가 유통될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중앙시장 내 양곡을 다루는 점포만 해도 800여 곳에 이를 정도였다. 중앙시장은 1970년대까지 전국의 점조직처럼 퍼져있는 양곡상들과 거미줄처럼 얽혀있었다.

양곡이 소비자들을 끌어 모으자 다양한 종류의 상인들도 이 곳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채소, 참기름 등 다양한 농축산물과 가공품들도 구색 갖추기 용으로 판매되면서 중앙시장은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과 더불어 서울 3대 시장에 이름을 올렸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정치사의 혼란기이기도 했다. 박정희가 군부 구데타를 일으킨 후 1963년 12월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시대가 막이 오른 것이다. 정부에서는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고 민심을 장악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는 데 생필품 가격도 정부에서 조율할 정도였다.

1963년 06월 2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주재한 브리핑 모습.
1963년 06월 23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주재한 브리핑 모습.

1965년 정부에서는 쌀값뿐만 아니라 서울 시민들에게 공급되는 쌀의 수요와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가격이 통제되자 쌀 민간시장은 조금씩 힘을 잃어갔고 정부가 정부미를 방출하게 되면서 쌀거래 중심지였던 중앙시장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양곡 수급을 원활하게 하고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정부는 양곡 현물시장을 활용하는 방안을 수립한다. 당시에도 쌀값은 여름철 단경기에 폭등하고 가을철에는 폭락을 반복해 양곡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는 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농림부는 용산역에 양곡시장조합을 개설한다.

양곡시장조합은 1968년 4월 1일 문을 열었다. 조합원은 유통상인들이 주축이 돼 구성됐다. 양곡창구일원화를 위해 설립된 양곡시장조합은 정부미 반출은 물론 방출가격도 조합운영위원회에서 매일 결정, 고시했고 지방미 평균 반입량의 70%를 의무적으로 서울에 반입해야 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양곡시장조합의 설립 목적은 양곡의 원활한 수급과 가격안정이었다. 위탁상은 조합에 원매량을 신고했고 도매상은 구매할 양을 조합에 보고, 사전에 수급량을 조합에서 파악하는 게 조합 설립목적이다. 또한 정부는 부족량은 정부미로 충당, 잉여 물량은 매입해 연중곡가를 평준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1968년 4월 1일 서울시양곡시장조합 개장식 모습.
양곡시장조합의 설립 목적은 양곡의 원활한 수급과 가격안정이었다. 위탁상은 조합에 원매량을 신고했고 도매상은 구매할 양을 조합에 보고, 사전에 수급량을 조합에서 파악하는 게 조합 설립목적이다. 또한 정부는 부족량은 정부미로 충당, 잉여 물량은 매입해 연중곡가를 평준화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진은 1968년 4월 1일 서울시양곡시장조합 개장식 모습.

양곡시장조합이 정부미를 위탁 운영하면서 말썽이 생겼다. 위탁상들은 가격이 싼 정부미와 일반미를 섞거나 정부미를 일반미로 둔갑 판매하면서 폭리를 취했다. 계속해서 말썽이 생기자 정부에서는 양곡시장조합의 중간상인을 배제하고 결국 농협에서만 정부미를 취급하도록 했다.

당시 양곡유통은 용산역의 양곡시장조합과 왕십리 주변 신당동중앙시장이 담당하고 있었다. 정부에서는 양곡유통의 일원화를 위해 이들을 한 공간에 두고 쌀 유통시장의 일원화를 원했다. 이를 위해 정부에서는 1977년 강남 한복판에 양곡공판장을 설치한다.
 

1977년 1월 6일 양곡시장 및 화물차량터미널 모습.
1977년 1월 6일 양곡시장 및 화물차량터미널 모습.

서울특별시와 농림부는 강남 서초동 화물터미널안 하치장 1,800평의 임시도매시장을 마련, 1977년 1월부터 양곡시장을 이전, 개설했다. 원효로의 용산양곡시장과 왕십리에 있었던 중앙양곡시장은 모두 폐쇄되면서 서초동 양곡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양곡시장 개장은 중개상들의 이전을 강요했다. 용산시장 중개인 120여명, 시중중개상 11명, 신당동 중앙시장 33명이 이전했고 중개수수료는 가마당 350원, 하치장 임대료는 가마당 25원을 받았다.

서초동 양곡시장에서는 위탁상들이 독자적으로 쌀의 중매역할을 했다. 서초동 양곡시장은 가격의 고시와 쌀 수급 및 유통, 가격정책에 대한 관리와 감독, 통제를 일원화하는데 톡톡한 역할을 했다. 다만 여전히 가격의 등락폭은 잡기 힘들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협소한 장소가 양곡시장 발전에 걸림돌이 됐다. 결국 서초동 양곡도매시장은 10년 만에 이삿짐을 싸면서 막을 내렸다.
 

양곡시장에서 쌀을 반출하는 모습.
양곡시장에서 쌀을 반출하는 모습.

정부에서는 양재동 개포 계획지구에 새로운 양곡시장을 구상했다. 정부와 농협이 절반씩 출자한 양곡도매시장은 서울에서 일반미 거래량의 60% 이상을 취급, 시장기능을 통한 양곡 수급조절과 가격안정을 꾀하기 위해 건설됐다. 1988년 8월 드디어 국내 유일의 양곡 공영도매시장이 탄생했다.

양재동 양곡시장은 서초동 시장과 유통체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정부에서 기존 위탁상들의 독자적 쌀의 중매역할을 제한한 것이다. 위탁업무는 지정도매법인에서 하고 위탁상들은 지정도매법인에 소속돼 중개업무를 하도록 하는 체질 개선을 꾀했다.

당초 정부는 서초동 양곡시장을 양재동으로 이전키로 하면서 농협 공판장과 함께 농안법에 따라 지정도매법인 1개사를 설립, 위탁업무를 수행토록 방침을 세웠다. 서초동 위탁상들은 도매시장 이전을 극렬히 반대했다. 이들은 정부에 자신들이 주도하는 지정도매법인의 설립승인을 촉구했고 지정도매인을 이원화 할 경우 경쟁구도를 만들어 양질의 쌀을 확보하는 등 시장기능을 활성화 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위탁상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양재동 양곡시장은 농협, 한국양곡도매시장, 위탁상협회가 서울지역의 양곡 공급을 책임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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