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자조금 운동의 시작 그리고 성과
축산자조금 운동의 시작 그리고 성과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4.01.10 10:15
  • 호수 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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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의무자조금 도입 20년 특별 기획

[본 기사는 한돈자조금 20년사에 먼저 수록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프롤로그

자조금(Check-off fund)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진지 어느덧 30년을 훌쩍 넘었다.

1980년대 축산농가들이 미국사료곡물협회의 도움을 받아 자조금 제도를 배우기 위해 미국을 찾았던 때만 하더라도 생소했던 이 개념은 농축산업계 종사자라면 누구나 아는 공기와 같은 제도가 되었고 다른 산업에도 영향을 주어 자조금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자조금은 각 품목의 소비촉진을 비롯해 산업발전을 위해 농가 스스로 기금을 조성하고 사용한다는 아주 단순한 개념의 사업이다.

우리 사회에는 노동조합, 각 산업이나 품목을 대표하는 협회가 무수히 많고 구성원의 권익 향상을 위해 회비나 노동조합비를 각출해 기금을 조성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농업 분야처럼 종사자가 무수히 많고 또 어떤 조직에 얽매여 있지 않은 농가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소득 중 일부를 자발적으로 기금으로 내놓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한두 번은 내놓을 수 있지만, 반복해서 협조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많은 품목이 도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며, 많은 품목이 자조금 단체를 꾸려 사업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조금 제도에는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면서 협력하도록 하는 묘수가 담겨야 한다.

자조금 사업의 성공을 평가하는 지표는 기금을 어떻게 알뜰하게 사용해 우리 품목 발전을 이뤘느냐에 있지 않다. 사업의 성과는 뒤에 일이고, 어떻게 하면 농가들이 눈앞에 이익을 포기하고, 공동의 이익 그리고 미래의 큰 이익을 추구하며 기금 조성에 참여하게 하느냐에 있다.

1992년 대한양돈협회와 대한양계협회 회원들이 자조금 사업을 처음 추진했지만, 농가들의 참여 저조로 쓰디쓴 경험을 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다.

 

축산자조금 도입 운동의 시작

자조금제도는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생산한 농산물의 판매금액 중 일부를 거출하여 기금을 조성해 해당 품목의 소비촉진 등 산업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제도다.

1980년대 축산단체들은 미국사료곡물협회 박영인 한국지사장을 통해 자조금 프로그램을 학습하기 시작했고, 1985년 6월에는 대한양돈협회 전동용 회장을 단장으로 미국의 자조금 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당시 시찰단은 전동용 양돈협회장을 단장으로 김현욱·김성식 국회 농수산위원, 농수산부 김병호 농업유통실장과 이수현 중소가축계장이 참석했고, 한백용 양돈협회 전무, 황인옥 양계협회 전무, 미국사료곡물협회 박영인 한국지부장, 동아일보 이연탁 경제부장 등 모두 9명으로 꾸려졌다.

이렇게 시작된 축산업계의 자조금 학습은 시장개방과 축산물 공급과잉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1980년대 후반 정부에 공식 건의됐다.

 

매일경제신문 1987년 11월 24일자 15면

1987년 11월 24일자 매일경제신문에는 돼지 파동 기사가 큼지막하게 보도되었다. 무려 1년 6개월간 지속되고 있는 돼지 파동이 얼마나 심각한지 보도하면서 양돈 농가들의 대책 마련 촉구 기사가 함께 담겨 있다.

10월 한 마리에 10만 원은 유지하던 것이 11월 들어 정부가 돼지가격 안정대책을 두 차례나 발동했지만 7만 1천 원까지 하락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12만 8천 원보다 5만 7천 원이 하락한 것으로 일부 지방에서는 6만 5천 원에 돼지가 거래되고 있다고 상황을 전한다.

정부의 개입에도 돈가 하락이 계속되자 11월 24일 양돈협회 주최로 돼지가격 안정을 위한 자구 모임이 개최되었고 전국의 양돈농가 30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한 양돈농가들은 돼지 파동 피해를 줄이기 위한 건의문을 채택하였는데 △새끼를 낳을 수 있는 어미돼지의 과감한 감축 △생산원가 절감을 통한 경쟁력 강화 △소비촉진과 수요개발 참여 △양돈원자재의 관세 및 부가세감면 △가격안정과 유통개선을 위해 자조금 제도 실시 등을 담고 있다.

1년 6개월간 지속된 돼지 파동은 1986년 여름부터 돈가가 하락했음을 의미하고 있었던 만큼 양돈 농가들은 깊은 절망 속에 대안으로 자조금제도 도입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1987년 12월 11일 보도에는 돼지고기, 우유, 닭고기 등의 생산과잉과 소비 부진으로 어려움에 처한 소식을 전하면서 소비촉진을 위해 각계각층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근본적 대책으로 축산물을 판매할 때 일정 금액을 떼 기금을 마련해 대응하는 자조금 제도를 실시할 수 있도록 정부가 허용해 줄 것을 주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생산과잉과 소비 부진으로 1980년대 후반 어려움에 처한 축산업계가 한마음으로 정부에 자조금 제도도입을 요청하고 있었고, 언론들도 이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축산물 가격이 일제히 하락한 이유는 1980년대 전업 양축농가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현대식 사양기술이 보급되면서 생산성이 향상됐기 때문이다.

생산만 하면 소비가 되던 축산물 공급 부족 시대가 종식되고, 언제든 생산이 수요를 초과할 수 있는 시대를 양축농가들은 경험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시작된 자조금 도입 운동에도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미국 등 축산선진국의 사례를 전파하는 등 자조금의 도입 필요성을 알렸지만, 정부가 움직이기 시작한 때는 1980년대 후반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이 괘도에 오르고 축산시장 개방을 골자로 하는 협상 내용이 알려지면서부터다.

 

동아일보 1987년 12월 11일 13면
동아일보 1987년 12월 11일 13면

정부 자조금 제도에 관심을 보이다

새로운 제도와 정책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제도도입의 필요성, 제도도입에 따른 효과 그리고 기존 법률과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국책연구기관이나 학회, 학자들이 정부의 의뢰로 조사와 연구를 하게 되고 이를 근거로 법률 제정에 들어가게 된다.

1987년 농촌경제연구원은 김영삼 정부 시절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게 되는 허신행 박사가 연구책임자로 자조금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다.

당시 연구진에는 정안성, 허덕, 김병률 등이 참여해 자조금 프로그램 전반에 대한 조사사업을 진행했고, 이를 기반으로 법률 제정과 1990년대 자조금 사업이 시행된다.

허신행 박사는 보고서 작성 이후 1988년 7월 24일 자조금제도를 살피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도 한다.

자조금제도가 관심을 받게 된 것은 당시 미국 등 농산물 수출그룹들이 농업 보조금의 완전 철폐를 골자로 농산물의 완전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 미국이 쇠고기 수입을 완전히 허용하라며 우리나라를 GATT에 제소하는 등 시장개방 이슈는 농촌을 자극했고, 정부 역시 개방을 가정한 새로운 농정 방향을 제시해야만 했다.

시장개방은 대규모 농업, 전업농을 넘어 기업 수준의 농업경영을 하고 있는 선진국 축산업계와 국내 시장을 두고 경쟁을 하는 것으로 여러 대책이 필요했다.

1989년 3월 18일 정부는 1992년까지 농어촌에 16조 원을 투자해 농업생산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목표로 대책을 발표한다.

당시 대책에는 농업생산구조 및 농촌생활환경개선, 농축산물 시장개방에 따른 대책 등을 담았는데 이를 ‘농어촌발전종합대책’이라 불렀고, 이를 법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농어촌개발촉진법’을 제정해 시행하게 된다.

 

1989년 3월 18일 동아일보 기사. 정부는 1992년까지 농어촌에 16조 원을 투자해 농업생산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목표로 대책을 발표했다.
1989년 3월 18일 동아일보 기사. 정부는 1992년까지 농어촌에 16조 원을 투자해 농업생산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목표로 대책을 발표했다.

당시 대책에는 농지 소유 상한 폐지, 대규모 영농이 가능하도록 영농법인 설립근거 마련, 농지구입자금과 영농자금을 우선 지원할 수 있는 세제 감면 방안과 영농어자금 신용거래제도 도입 등 금융지원을 강화하고, 고추나 마늘은 계약재배 등이 담겼는데 현재 국내 농업 관련 제도의 상당수가 1990년도를 전후해 도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농어촌발전종합대책에 축산부문은 자조금 제도를 도입해 가격 하락 시 지원하는 가격안정기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당시 정부의 대책 대부분은 공무원과 전문가들이 짜낸 정책이었다면, 자조금 프로그램은 축산농가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마련된 정책이라는 점이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지속적인 자조금 필요성 제기

 

축산자조금제도에 대한 조찬회가 1988년 3월 17일 대한양돈협회, 대한양계협회, 한국낙농육우협회가 공동주최하고 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부 후원으로 개최됐다.
축산자조금제도에 대한 조찬회가 1988년 3월 17일 대한양돈협회, 대한양계협회, 한국낙농육우협회가 공동주최하고 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부 후원으로 개최됐다.

낙농육우협회 등에서 활동했던 농민지도자들은 지금은 고인이 된 박영인 박사(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회장, 자조금연구원장)로부터 자조금 제도를 소개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자조금에 대해 축산업계가 광범위하게 학습이 가능했던 것은 양돈협회, 양계협회, 낙농육우협회 등이 발행하고 있었던 월간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영인 박사는 전업화가 상대적으로 빨리 일찍이 협회가 만들어진 대한양계협회와 수시로 소통했다. 당시 양계협회는 서울대 오봉국 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이 되었고, 발행하는 ‘월간 양계’ 또한 학술지 수준의 퀄리티와 최신 사양 기술, 해외축산 정보들을 담은 앞선 축산전문잡지였다.

박영인 박사는 축산자조금과 축산계열화사업과 관련한 원고를 많이 투고했고, 이후 대한양돈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양돈, 한국낙농육우협회가 발행하는 월간 낙농육우 등에 자조금제도를 소개하고 도입 필요성을 담은 원고를 기고했다.

박영인 박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사료곡물협회가 후원하는 해외 선진지 견학, 각종 세미나와 좌담회를 주최하거나 후원하면서 다시 이들 협회가 발행하는 월간지를 통해 관련 소식이 자세히 보도되어 전파되게 됐다.

이후 자조금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던지 일부 축산지도자들은 자조금 사업만 시작되면 축산업계가 직면한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박영인 박사는 1980년대 축산단체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자조금제도를 소개하는 여러편의 원고를 기고하게 된다. 사진은 월간 양돈 (The Korea Swine Journal)제9권5호통권93호 / Pages.44-48 / 1987 대한양돈협회 (Korea Swine Association)
박영인 박사는 1980년대 축산단체가 발행하는 월간지에 자조금제도를 소개하는 여러편의 원고를 기고하게 된다. 사진은 월간 양돈 (The Korea Swine Journal)제9권5호통권93호 / Pages.44-48 / 1987 대한양돈협회 (Korea Swine Association)

자조금 사업의 시작

1980년대 자조금 제도에 대한 학습이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축산업계는 시장개방 이슈 그리고 축산물 공급과잉에 따른 문제가 함께 발생하며 축산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자조금 제도 도입에 대한 열망이 커지고 있었다.

첫 자조금 제도는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농발법)에 담기게 되었고, 1990년 농발법시행령 제24조에 자조금 조성 시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품목으로 돼지, 닭, 우유 및 기타 농림수산부령으로 정하는 농축산물로 대상을 명확히 하게 된다.

1980년대부터 축산자조금 운동을 펼쳐온 대한양돈협회, 대한양계협회, 한국낙농육우협회가 첫 자조금 사업을 시행할 단체로 지목됐다.

1991년 예산작업에 들어간 정부는 시행령에 명기된 세 단체에 참여를 타진했지만, 낙농육우협회는 낙농진흥회 설립을 비롯한 원유유통구조 개선사업에 먼저 집중할 필요가 있다며 빠지게 되고 돼지와 계란 두 품목이 처음으로 자조금사업을 시행하게 된다.

정부도 농가들의 의지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농가들이 조성한 금액과 동일한 금액을 매칭펀드로 보조하기로 해 단체들이 자조금 조성에 더 힘을 모으는 동력이 된다.

1992년 양계협회와 양돈협회에 각각 1억 5천만 원의 보조금이 지급됐다. 법률 제정 2년 만에 자조금 사업이 추진됐고 양돈협회와 양계협회가 도전했지만, 생각처럼 자조금 사업의 성과는 크지 못했다.

이들 두 단체는 자조금 사업을 2000년대 초반까지 매년 도전했지만, 협회비를 모으는 수준밖에 농가들로부터 기금을 모으는 데 실패했다.

사업이 지속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조금 조성을 농가 자율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자조금을 ‘Check off’로 규정한 것도 노동조합비처럼 축산물을 판매하고 대금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일괄적으로 자조금을 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인데, 입법 과정에서 이 부분은 농가의 자율 기부로 선회된다.

1990년 제정된 농발법시행령 제23조(자조금의 조성방법등)를 보면 “자조금은 농어민이 생산자단체를 조직하여 자율적으로 당해 생산자단체에 납입하는 금액으로 조성한다”로 되어 있다.

농어민의 자율적 참여는 산업발전에 관심이 많은 농가의 경우에는 자발적으로 기금 조성에 나서지만, 상당수의 농가는 자조금 조성에 협조하지 않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자조금 사업이 시작된 1992년 양돈농가수는 12만4163 농가(1/4분기)에 달했는데 당시 기준으로 전업농이라 불리는 1000두 이상 사육농가는 448호에 불과했다.

양계도 상황은 비슷하였는데 당시 양계농가는 19만5963호(1/4분기)로 전업농으로 분류할만한 3만수 이상 사육농가는 358호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소규모 농가는 품목 전환이 잦았고, 가축 사육 말고도 쌀이며, 채소 등의 농사를 겸업하였기 때문에 자조금 조성에 관심을 기울일 여지가 적었다. 이로 인해 기금 조성에는 기여하지 않으면서, 자조금 사업을 통해 얻어지는 이익은 공유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이를 자조금 연구자들은 무임승차자(free rider)라 부르며 이들 무임승차자 때문에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사업에 협조하지 않는 의사 결정을 내리게 된다며 무임승차자를 줄이는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는 결과를 원인으로 갖다 놓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기금 조성에 어려움을 겪은 이유는 소규모 농가의 수가 너무 많았다는 게 근본 원인이다. 최소한 양계협회나 양돈협회에 가입이라도 해야 자조금 거출 협조를 요청할 수 있으나, 소규모 농가가 다수다 보니 산업에 대한 애정도 없고, 협회 사업 참여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두 번째는 당시 자조금 수납을 대행해 줄 곳이 없어 납부의 편리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수입 중 일부를 부정기적으로 자조금 계좌로 송금하는 방식은 한두 번은 협조할 수 있겠지만 지속 가능하지 못한 방식이다.

특히 자조금 조성이 가장 필요할 때인 축산물 가격 하락기에는 농가 소득 감소로 납부를 주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은 낙농업계가 자조금 사업을 시행한 첫해 큰 성과를 내면서부터다.(여기서 성과란 기금 조성 규모로 판단한 것임)

양돈협회와 양계협회는 수년 동안 수억 원의 기금 조성도 어려웠으나 낙농육우협회는 시행 첫해 약 30억 원의 기금을 확보했다.

 

낙농자조금의 성공과 의무자조금 추진

 

한국낙농육우협회가 임의자조금으로 제작한 ‘사랑의 우유’캠페인 광고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
한국낙농육우협회가 임의자조금으로 제작한 ‘사랑의 우유’캠페인 광고를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

한국낙농육우협회는 대한양돈협회, 대한양계협회와 함께 1980년대 자조금 사업에 대해 스터디를 해왔지만, 자조금 제도 도입 직후인 1992년 자조금 사업에 곧바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낙농진흥회 설립과 원유 유통구조 개선 사업에 낙농육우협회의 역량을 집중하고 있던 때라 자조금 사업에 힘을 기울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낙농진흥법 개정을 통해 원유유통기구인 낙농진흥회 설립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998년 총회에서 자조금 사업 추진을 결의했다.

낙농자조금 사업은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시행 첫해 잘 거출되어 쉽게 사업이 진행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농가들의 반발이 거세어 설득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축종처럼 1992년 자조금 사업에 도전하지 않았던 이유도 농가 설득에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돼지나 계란은 자조금 사업을 통해 소비촉진 사업을 시행하면 판매가 활성화 되면서 가격이 올라 농가에게 이익이 돌아가지만, 유업체에 고정가격에 원유를 판매하고 있는 낙농 목장은 농가들이 기금을 각출해 소비촉진 사업을 실시하더라도 원유 가격 인상 같은 직접적인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돈은 농가가 내고 이익은 유업체에 돌아갈 것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크게 작동한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낙농-유가공업계는 1990년대 연이은 악재로 우유 소비촉진사업이 전방위적으로 필요했던 때이다.

진짜 우유 논란, 고름 우유 파동, 항생제 잔류 파동 등 우유와 관련된 부정적 이슈가 연이어 터져 나오며 우유 소비는 줄어들고, 유업체가 파산하고, 과잉 생산으로 원유 생산조정 압박에 상시 시달리게 됐다.

낙농 지도자들은 소비가 활성화되면 농가들이 납품할 수 있는 원유의 양이 늘어나 농가 소득이 향상될 것이라며 농가들을 설득한 끝에 자조금 사업은 시작될 수 있었다.

낙농육우협회는 1998년 8월 시작된 자조금 거출은 이듬해 1999년 7월까지 16억 원의 기금이 조성됐고, 정부의 매칭펀드를 더해 30억 원대의 자조금 사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당시 큰 화제를 낳은 ‘사랑의 우유 나누기 캠페인’이 시작됐는데 외환위기 속에 경제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음에도 소비자들이 우유 나누기 캠페인에 대거 참여하면서 캠페인 광고는 대성공을 하게 된다.

캠페인 광고의 성공은 낙농가들의 자조금 납부에 긍정적 영향을 주어 낙농자조금은 거출과 집행의 선순환이 이뤄진다.

낙농자조금은 이후 거출율이 계속 상승하면서 정부의 보조금을 합해 50~60억 원대 기금을 매년 조성해 사용할 수 있게 됐고, 계속된 실패로 동력을 상실했던 양돈과 양계협회 그리고 때마침 창립한 한우협회 등도 자조금 사업에 관심을 갖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당시 낙농자조금의 성공은 유업체가 자조금 수납기관 역할을 대행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농가들은 유업체나 낙농조합 등으로부터 받는 유대에서 이러저러한 비용들을 공제하는 일이 많았는데, 유업체와 낙농조합들이 농가들에게 지급될 유대에서 자조금을 떼어서 낙농육우협회 자조금 계좌로 송금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았고 임의자조금이었지만 80% 이상의 농가들이 참여하게 된다.

낙농자조금의 성공 원인을 조사하기 시작한 축산단체들은 축산농가라면 의무적으로 자조금을 납부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고, 이를 정부와 국회 등에 건의하기에 이른다.

 

의무자조금 사업의 제도화

시장개방과 외환위기 등으로 어수선했던 1990년대 말을 지나면서 양돈협회와 양계협회가 중심이 된 축산단체협의회는 의무자조금 제도화를 위한 농정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여기에 막 출범한 한우협회 그리고 계육협회(현 한국육계협회) 등이 의무자조금 법제화 농정활동에 가세하면서 힘을 받게 된다.

시장개방 등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축산업계가 이렇게 자구노력에 힘을 기울이자 여러 국회의원들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고, 처음에 부정적 의견을 내었던 농림부와 농협중앙회도 자조금법 제정에 힘을 보태기 시작해 2002년 ‘축산물소비촉진에관한법률’이 국회를 통과하게 된다.

의무자조금제도의 핵심은 각 품목협회와 농협중앙회가 자조금 사업을 위한 인적 구성을 주도하고, 전체 농가들이 참여하는 투표를 통해 자조금 사업의 총회격인 대의원회를 구성하고 대의원들은 다시 자조금의 이사회 격인 관리위원을 선출하면서 조직을 갖추게 된다.

대의원회와 관리위원회는 축산단체들이 마련한 거출 계획, 사업계획 등을 심의하고, 이를 의결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전에는 각 품목단체들이 임의로 자조금 사업계획을 수립해 이를 정부에 제출하고, 농가들이 자조금을 납부하면 납부한 금액만큼 정부가 매칭해 펀드를 조성하고 품목단체가 사업계획에 따라 집행하는 구조였다.

의무자조금 사업의 시행은 전체 농가들이 참여해 대의 기구를 조직하고, 대의원회, 관리위원회로 이어지는 기구를 통해 민주적으로 농가들이 조성한 기금을 관리 집행하도록 했다. 의무자조금인 만큼 누구나 편리하게 자조금을 납부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한데, 자조금 거출 창구를 정한 것이 특징이다.

우유자조금이 유업체와 낙농조합을 거출 창구로 삼은 것과 같이, 한우와 돼지는 도축장(공판장, 도매시장, 일반도축장), 닭고기와 계란은 도계장이 거출 창구 역할을 하게 되었고, 도축 마리당 일정한 금액을 자조금으로 조성하게 됐다.

대한양돈협회가 가정 먼저 자조금 조직화에 나서 2004년 자조금 조성이 시작되었고, 뒤이어 한우도 자조금 조직화에 성공하면서 2005년부터 자조금 조성이 시작됐다. 낙농은 임의자조금 사업에서도 거출율이 매우 높아 의무자조금 단체로 전환을 미루다가 2006년에 의무자조금 사업으로 전환했다.

의무자조금 거출 창구로 지정된 일부 도축장이 자조금 거출에 협조하지 않고, 위헌 소송까지 벌이면서 좌초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컸지만, 갈등이 극적으로 봉합되면서 돼지와 한육우의 자조금 사업은 탄탄해지게 된다.

이후 2006년 닭고기, 2009년 계란, 2013년 오리, 2014년 육우까지 주요품목들이 의무자조금 사업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축산자조금의 부익부 빈익빈

1992년 임의자조금 사업 시작 이후 10여 년간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양돈자조금은 의무자조금 사업 시작 이후 높은 거출율을 보이며, 현재 매년 300억 원대의 기금을 조성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지난 2005년부터 거출을 시작한 한우자조금도 임의자조금 시행 경험은 없지만, 자조금대의원회와 자조금관리위원회 구성에 성공하면서 양돈 다음으로 많은 기금을 조성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의무자조금제도 도입 이후 자조금 사업으로 큰 성과를 내는 품목이 있는가 하면, 닭고기, 계란, 오리 등의 품목은 의무자조금 사업을 시행하기는 했지만 활성화에는 이르지 못했다.

육계와 계란은 산업생산액 기준으로 낙농업을 넘어섰지만, 기금 조성에는 낙농유가공업계에 미치지 못해 수년째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자조금 운동에 열심이었던 양계 부분의 ‘계란’은 거출 창구 지정문제와 대규모 사육 농가의 자조금 비협조, 육계는 축산계열화업체와 농가 간 갈등으로 자조금 사업이 좀처럼 활력을 얻지 못했다.

2021년 기준 우유자조금은 정부 보조금, 유업체 분담금 등을 포함해 110억 원의 자조금을 조성했지만, 계란자조금은 13억 원의 자조금을 조성하는데 그쳤고, 닭고기 자조금은 산업 내부 갈등으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기금 조성 자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오리도 산업 규모로 보면 다른 품목과 비교해 50~60억 원대의 자조금을 조성할 수 있지만 13억 원 내외 규모에 그치고 있다.

자조금 사업 활성화에 거출 방식을 어떻게 정하고 이를 강제하느냐가 중요하지만, 산업종사자들이 산업을 활성화하겠다는 의지와 협조가 거출 방식을 정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농수산 자조금으로 확산

축산자조금의 법제화와 성공은 농어업계를 자극했다.

의무자조금 사업 시작 이후 축산업계가 1년에 집행하는 자조금 규모는 어림잡아 700억 원에 이른다. 만약 계란과 닭고기, 오리 자조금이 정상적으로 거출돼 운영될 수 있다면 축산자조금은 농가 조성금과 정부의 보조금을 더해 1000억 원을 상회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다.

축산자조금을 활용해 소비촉진은 물론이고 조사연구사업, 농가 교육, 소비자 정보제공 등을 실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농업계에서도 자조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특히 공급과잉 등으로 가격이 폭락하는 상황은 농업계나 축산업계 공통으로 경험하고 있으므로 축산업계가 공격적인 소비촉진 활동을 펼치고 수급조절사업에 자조금이 활용되는 것을 확인하면서 과수와 채소, 수산물, 가공식품까지 자조금 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농업 자조금도 농안법 등의 근거 조항으로 인해 자조금 사업을 2000년대 초부터 실시는 가능했지만, 축산업과 달리 농가 수가 많고 조직화도 미흡하며, 농수산물의 유통구조까지 축산업과 달라 활성화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2013년 ‘농수산자조금의 조성 및 운용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농수산 자조금의 설립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사과, 배, 감귤, 복숭아, 포도와 같은 과수는 물론이고 마늘, 양파와 같은 양념채소, 파프리카, 인삼, 백합, 자생란과 같은 꽃까지 그 품목도 다양하다.

수산분야에서도 김, 전복, 광어, 메기, 민물장어, 송어, 향어, 관상어, 굴, 미역 등 양식수산물을 중심으로 자조금 단체가 설립됐고 전통주, 김치, 장류와 떡류와 같은 전통식품까지 그 영역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자조금제도는 축산분야 의무자조금제도 입법 당시 있었던 위헌 논란은 사라지고 농축수산분야 보편적 제도로 자리 잡게 됐다.

 

소결

우리 농업계는 어떤 사안이 벌어지면 정부가 무언가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 정부가 과거 국력이 약했던 시절에도 농업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지원을 하기도 했다.

정부의 농업에 대한 지원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국민들의 먹거리 문제 해결을 위해서였는데, 쌀이 부족하던 시절 쌀의 자급을 위해 농민들을 지원했고, 고기가 부족하던 시절 축산물의 자급을 위해 축산농가를 지원했었다.

두 번째는 시장개방을 결정하던 시기 축산업계의 양보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지원을 확대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축산물 시장을 전면 개방하기로 하면서 축산업계를 지원했고, 미국·EU·호주 등 농축산물 수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농축산물 관세를 철폐하기로 하면서 농축산업계 지원을 확대했다.

하지만, 시장이 개방되고 먹거리가 풍족한 세상이 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어떻게든 지원해 쌀 한 톨이라도 더 생산하도록 유도했던 절박감, 천정부지로 치솟는 축산물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해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라도 더 키우게 하려 했던 시절은 시장개방과 함께 벗어났기에 정부가 농업을 대하는 방식, 농민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여기에 WTO가 출범하면서 정부가 농축산분야에 사용할 수 있는 보조금의 성격도 엄격히 제한하면서 자조금을 활용한 자구노력은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이러한 가운데 자조금 제도는 농민들의 정부 의존적 사고를 벗어나게 하고, 산업의 주체적 행동을 하게 했다. 스스로 모여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기금을 조성하고, 산업발전을 위해 함께 고민하게 했다. 과거 농민은 그냥 생산만 잘하면 그만이었다.

정부가 바라는 농민의 상도 ‘생산만 잘하라’였다.

하지만 시장이 개방된 지금 생산만 해서는 또 혼자만 잘해서는 결코 우리 농업은 발전할 수 없다. 거대 자본이 농업에 진출하고, 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 농민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력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정부의 지원이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농민들은 협력하는 법을 자조금을 통해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시작된 축산농민의 자구노력은 2002년 의무자조금 제도화에 성공했고 시장개방의 파고를 자조금을 중심으로 한 협력을 통해 넘어서게 됐다.

현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자조금 품목도 협력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며, 각 품목의 유통구조에 맞는 거출방법을 고안하고 그 안에서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면 낙농·한돈·한우와 같이 자생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이 기사는 농장에서 식탁까지 10~12월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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