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쌀 개방의 역사와 2000년 이후 양곡정책①
한국 쌀 개방의 역사와 2000년 이후 양곡정책①
  • 연승우 기자
  • 승인 2018.09.03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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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1980년 무슨 일이 있었을까?

[팜인사이트= 연승우 기자] 한국의 쌀 자급률이 처음으로 100%를 이뤘던 것은 1976년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혼분식 장려, 막걸리에 쌀 사용 금지 등 쌀 소비 억제정책과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보급되면서 600만톤에 이르는 쌀을 생산하면서 쌀 부족에서 벗어났다.

그 후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선 1980년, 그해 여름 전국적인 이상저온으로 냉해가 발생해 쌀 생산량이 355만톤으로 크게 줄면서 해방 이후 최악의 흉년으로 기록된다.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로 인한 생산량 감소는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 문제는 흉년이 아니라 이후 전두환 정부의 대처다.

흉년이 들자 전두환 정부는 위기의식을 느꼈고 부족한 쌀을 수입하기로 했다. 이듬해인 1981년 전두환 정부는 쌀 소비량과 쌀 생산량을 계산해 225만톤이 부족할 것으로 판단해 외국으로부터 알고 있는 곡물메이저들이 순수하게 한국인들을 위해 저가에 쌀을 팔 리가 없다. 한국인들이 먹는 쌀인 자포니카는 재배하는 나라가 일본, 대만, 중국의 동북지역, 그리고 미국과 호주에서만 생산하고 소비가 적어 생산량도 많지 않다.

한국에서 부족한 쌀 225만톤을 수입하려 하자 곡물메이저는 국제 쌀값을 2배로 올려버렸고 정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2배 가격을 주고 수입을 하면서도 곡물메이저와 이중 계약을 한다. 그 이듬해인 1982년 27만톤, 1983년 22만톤의 미국쌀을 추가로 수입하기로 한 것. 이로 인해 미국 정부는 청문회까지 열게 되고 한국은 1982년 쌀 생산량을 회복했지만 27만톤의 쌀이 추가로 수입돼 쌀값 폭락의 원인이 됐다. 1980년 흉년의 교훈은 주식인 쌀이 부족하면 곡물메이저들은 얼마든지 가격을 올려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주식인 쌀을 자급하지 못하면 외국기업에게 우리의 밥상을 지배당할 수 있다.

여기에 한술 더 떠 당시 정부는 부족한 쌀을 수입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쌀의 이월재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약 50만톤의 쌀을 더 수입했다. 여기에다 추가로 2년동안 50만톤의 쌀을 추가로 수입하기로 약속을 했으니 1982년 이후 한국은 쌀이 남아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1982년 이후 연쇄적인 쌀값 대폭락은 여기서 시작됐다.

UR ‘가공용 쌀이 들어오다’

1992년 한국은 우루과이 라운드(UR)라는 듣도 보도 못한 무역협상에 봉착하게 되면서 농산물 전면개방이라는 시련을 겪게 된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대통령직을 걸고서라도 UR협상에서 쌀 개방만큼은 막겠다고 했지만 결국 부분개방을 하게 된다.

1994년 우루과이 라운드에서 한국은 농업분야에서는 개발도상국으로 인정돼 쌀은 관세화가 유예된다. 그러나 쌀 이외 농산물에 대해서는 관세화, 즉 시장을 개방하게 돼 수입농산물이 한국에 선을 보이게 된다. 관세화가 됐다는 말은 국내법으로 수입자체가 금지됐던 농산물을 UR협상에서 정해진 관세만 부과하면 수입할 수 있다는 것으로 즉 수입개방과 같은 말이다.

쌀은 관세화 유예, 즉 수입개방을 10년 뒤에 하는 대신 의무적으로 쌀을 일정량 수입하는 단서조항을 달게 된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쌀 개방을 막았다고 발표했지만,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이 가공용으로 국내로 수입됐기 때문에 대통령직을 사퇴했어야 한다.

그나마 김영삼 정부는 최소시장접근물량으로 수입되는 쌀을 밥상용이 아닌 가공용으로 돌리는 조치를 해서 시장격리를 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수입된 쌀은 모두 떡, 막걸리 등의 가공용으로만 사용하게 했다. 저가의 가공용 쌀이 국내에 들어오자 이를 소화하기 위해 쌀 막걸리가 나왔고 쌀 과자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하철이나 시장에서도 한 팩에 천 원 하는 떡이 판매됐다. 농산물 개방이 우리의 밥상, 식문화는 별 상관없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게 작용하고 있거나 실제로 많은 걸 바꾸고 있다. 당시 한국의 UR 협상에 대한 평가는 외국 언론보도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당시 외국 언론에서는 ‘한국이 UR 협상에서 가장 실패한 나라 중의 하나’라고 보도했다.

10년 후, 또다시 무늬만 쌀 개방 유예

UR 협상에서 유예된 10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협상 이후 한국의 쌀산업을 개편하겠다고 했던 정부는 별다른 준비없이 2004년을 맞이했다. 2004년 한국은 쌀 관세화 유예에 대한 재협상이 진행되면서 다시 쌀 관세화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농림부는 2004년 쌀 관세화 협상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쌀이 관세화, 즉 개방된다고 주장했다. 농림부는 UR 협상에서 받은 쌀 관세화 유예는 10년이기 때문에 유예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협상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관세화 유예 조치가 끝나고 관세화, 즉 개방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진보적 농업학자들과 농민단체들은 UR 이후 새롭게 진행된 DDA1(도하 Doha 협상)이 끝나야 한국의 쌀 관세화 유예에 대한 재협상이 성립된다고 주장했지만,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고 농림부는 쌀 관세화 협상에 돌입했다.

2004년 재협상에서는 다시 10년간 개방을 유예하는 대신 1988~1990년의 쌀 소비량 평균의 8%까지의 물량을 최소시장접근물량(MMA)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며, 8%의 물량은 저율관세(TRQ)인 5%로 영구적으로 반입하기로 합의했고 여기에다가 가공용 쌀과 함께 저율관세물량 8%는 시판용 밥쌀로 수입하기로 했다. 시판용 밥쌀은 우리가 흔히 먹는 자포니카 계열의 쌀로, 미국의 칼로스 쌀과 중국 동북3성에서 재배되는 쌀로 가공용이 아니라 밥해 먹을 수 있는 쌀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협상 결과에 따라 2005년 2만3천 톤의 밥쌀이 수입돼 매년 늘어나 2014년에는 12만3천 톤을 수입해야 했다. 올해도 12만3천 톤의 쌀이 들어왔다. 농협경제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수입된 밥쌀은 식당과 단체급식업체에 69%가 팔리고 17%가 김밥과 떡으로 판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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