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조금을 만든 사람들] 축산자조금의 산파 역할 30년 고(故) 박영인 박사
[자조금을 만든 사람들] 축산자조금의 산파 역할 30년 고(故) 박영인 박사
  • 김재민 기자
  • 승인 2024.01.09 1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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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돈협회 등 축산단체에 자조금 프로그램 처음 소개
자조금연구회 만들어 축산단체 활동 뒷받침

[본 기사는 한돈자조금 20년사에 먼저 수록된 원고를 일부 수정하여 소개합니다.]

축산자조금을 이야기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된 박영인 박사(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회장, 자조금연구원 이사장)를 빼놓을 수 없다.

193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62년 서울대학교 농과대를 졸업하고 협동조합 운동에 심취해 농민은행(현 농협)에 입사한다. 하지만 협동조합 운동의 이상과 현실에서의 협동조합 운동의 커다란 차이에 좌절하며 안정된 생활을 포기하고 유학길에 오른다. 뉴질랜드 매시대학원에서 식품경영학 석사(1967년),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1969) 등에서 수학하며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혔다.

1976년부터 미국사료곡물협회 한국지회에서 일하면서 미국과 뉴질랜드 등의 선진 축산기술과 제도를 국내에 알리는 역할을 했으며, 1984년 건국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하는 등 학문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1970년대는 여러 축산품목협회가 설립되어 활동에 들어갔는데, 1960년대 설립된 대한양계협회를 필두로 1970년대 설립된 대한양돈협회, 낙농육우협회 등과 교류하며 축산과 농업 관련 선진 문물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박영인 박사는 자기 생각을 정리해 글로 남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각 협회가 발행하는 월간잡지에 그가 기고한 수많은 원고가 이를 증명한다.

특히 1980년대 들어 자조금의 필요성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조금 사업의 법제화 필요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축산업이 전업화 초기로 새로운 품종이 들어오고, 과학적인 사양기술이 보급되면서 생산성 향상을 경험한 때였다. 동시에 많은 청년 농민들이 축산농장을 창업하며 생산에 가담했고, 기업도 대규모 목장 건설로 축산업에 진입했다.

선진 축산기술의 도입과 축산농민과 축산기업의 증가는 공급 과잉을 불러왔고, 축산물 가격의 폭락과 폭등이 어느 때보다 심하게 나타났다.

생산만 하면 소비가 이뤄졌던 1970년대를 지나 이제 판매 촉진을 위한 마케팅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러한 상황 변화는 축산자조금 프로그램의 필요성으로 이어졌고 대한양돈협회 정동용 회장을 비롯한 축산단체들은 1985년 박영인 박사와 함께 미국 축산현장과 자조금 제도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정동용 회장 등 축산업계 관계자들의 미국 자조금 제도 시찰단 모습. 오른쪽 붉은 넥타이가 박영인 박사다.
정동용 회장 등 축산업계 관계자들의 미국 자조금 제도 시찰단 모습. 오른쪽 붉은 넥타이가 박영인 박사다.

초기 박영인 박사의 글들이 자조금 사업의 필요성을 담았다면 1980년대 후반에 가서는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조성해야 하는 지로 구체화됐다.

박영인 박사는 저술 활동에 그치지 않고 미국사료곡물협회 주관 세미나와 간담회, 토론회를 반복적으로 개최하며 국회와 정부 관계자들에게 자조금 프로그램을 알렸다.

그러던 중 1980년대 후반 농산물도 시장을 완전 개방한다는 기조가 담긴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중간 협상 내용이 공개되고, 미국 등 쇠고기 수출그룹의 쇠고기 시장 개방 압박을 겪으면서 이에 대응한 축산진흥 정책이 필요해졌고, 양돈협회 등 축산단체들은 자조금 제도 도입을 정부에 요청하게 된다.

이때 정부 관계자들은 박영인 박사가 수년간 제안해 온 자조금 프로그램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됐고, 1차 제도화에 성공하게 된다.

1992년 시작된 축산자조금 사업은 자조금 조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농가가 조성한 금액만큼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유인책이 있었지만, 소수의 농가만이 자조금 납부에 동참했고, 적은 금액으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자조금 사업을 일반 농가들은 물론이고 회원들도 효용을 체감하기 어려웠다.

자조금 사업이 시작되던 1992년 박영인 박사는 충남대학교 박종수 교수 등과 함께 한국자조금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자조금연구회는 1992년 시작된 자조금 사업을 관찰 연구하며 문제점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는데 1980년대까지 자조금에 대해 박영인 개인이 필요성을 이야기하고 제도화를 위해 도왔다면, 1992년 이후에는 여러 학자들이 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자조금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확산시키는데 노력하게 된다.

박영인 박사는 자조금 프로그램을 소개할 당시 자조금 제도를 체크오프(Check off)라 명명했다. 노동조합비의 사전 공제제도처럼 자조금도 기금 조성 방법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자조금 사업에 농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야 하지만 기금 납부는 노동조합비를 급여에서 공제하는 것처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간양돈 1998년 3월호 인터뷰.
월간양돈 1998년 3월호 인터뷰.

농가가 직접 자조금을 납부하는 방식은 참여율이 떨어져 장기적으로 자조금 납부자들까지 기금 조성에 협조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었는데, 실제로 1992년 시작된 양돈, 양계 자조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농가 협조가 원활치 못했다.

박영인 박사와 자조금연구회는 이를 경제학에서의 무임승차자 문제(free rider problem)로 풀어냈고, 1998년부터 양돈협회를 비롯한 품목단체들이 의무자조금 운동 전개의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다.

무임승차자 문제는 공공재와 같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서 어떤 재화나 서비스는 다수가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무임승차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개입을 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논리이다. 즉, 정부가 세금 납부를 국민들에게 의무화함으로써 국방, 치안, 복지 등의 공공서비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이다.

1990년대 자조금 사업은 일부 농가들이 조성해 소비촉진 프로그램을 실시했는데, 그 결과물을 기금 조성에 협조한 농가만 누리는 게 아니라 모든 농가가 누리면서 이 상황을 부당하게 느끼는 농가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실제 이러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기금 조성에 참여하는 농가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조금씩 기금을 납부하다가 납부하지 않는 농가들이 생겨나 사업의 지속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경제학적 논리였다.

박영인 박사와 자조금연구회는 이 같은 문제를 지속해서 제기했고, 1998년 축산단체들이 공동으로 의무자조금제도 도입을 정부와 국회에 공식 건의하고, 입법 청원을 하게 된다.

지지부진했던 축산의무자조금 제도 법제화 운동은 2001년 김건태 양돈협회장 취임 직후 본격화되는데, 김 회장은 의무자조금제도 법제화를 위해 박영인 박사에게 도움을 청하게 됐고, 국회 농해수위 의원, 정부 등과의 협의에서 박영인 박사가 적극 협조하면서 농정활동을 비교적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박영인 박사는 충남대 박종수 교수와 함께 2004년에는 자조금연구회를 모태로 자조금연구원(이사장 박영인, 원장 박종수)을 설립하고, 막 시작된 축산단체의 의무자조금사업을 측면 지원했다. 동시에 자조금 도입 운동의 시작과 법제화 과정, 의무자조금제도 도입 운동 등 축산자조금의 정착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2012년 박영인 박사는 한국자조금연구원을 해산하는 절차를 밟게 되는데, 축산자조금, 농수산자조금 프로그램이 모두 법제화에 성공하고 자조금 사업을 추진했던 한우, 양돈, 낙농 등의 품목이 자조금 사업을 건실히 실행하면서 자조금연구원의 설립 목적을 대부분 달성했다고 판단했다. 더 이상의 존치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사실 연구원 해산의 직접적 이유는 축산단체들의 홀대와 무관심도 한몫했다. 당시 박영인 이사장은 자조금 단체의 법인화나 축산업계 공통의 이슈 대응을 위해 자조금연합회 등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 축산단체들은 자조금연구원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박영인 박사가 서울대 농과대학을 졸업하고, 협동조합 운동에 심취해 계속 농협에 근무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자조금 프로그램은 국내에 도입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농촌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그의 열망이 그를 뉴질랜드와 미국으로 보내 선진 축산 제도를 경험하게 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한국 축산업의 부흥을 위해서는 자조금제도가 필요하다는 일념으로 30여 년을 산파 역할을 자임했다.

그 결과물이 축산자조금이고 시장 개방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서 있는 한우와 한돈 산업이다.

박영인 박사는 자조금연구원 해산절차를 마친 2012년 10월 자조금 포럼을 만들어 계속해서 자조금의 발전을 위한 조력자 역할을 다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킬리만자로 등반 여행을 떠났다가 2012년 10월 3일 새벽 아프리카 탄자니아 킬리만자로산 정상에서 향년 77세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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